78개의 소국가는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로 귀결이 되었다. 각 나라의 살아남기와 강해지기로 인해 투쟁과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약 1천 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서 가장 강한 하나의 국가만 살아남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명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여러 소국들이 백제나 신라로 지배체제가 바뀌었음에도 지명의 변화는 일부 지역에 국한되거나 또는 글자의 변경으로 나타났다. 확실한 국가체제인 삼국시대와 무력에 의한 강제 통합의 통일 신라 초기까지에도 이런 기조는 유지되어 지명은 소극적으로 개명이 되었다.
그러다가 중화주의 체제에 들어가 그 시스템의 적응 기간이 지나자 지명은 계획적으로 대규모로 개정됐다. 즉 중화주의 체제에 물들기 전에는 기존 지명이 존중되었으나 중국풍이 유행하자 경주지배계층이 문화권력을 앞세워서 그들의 존재감을 전국 지역에 과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관리하자 백제와 신라는 나라의 존망과 발전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두 나라는 동맹을 맺는데 이는 2등 백제와 3등 신라가 1등 고구려에 대항하는 구도이었다.
고구려는 서북 국경지역에 유목과 농경이 어우러진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자 이에 대비하느라 한강지역에 신경 쓸 여력이 적어지고 성왕과 진흥왕은 배양된 실력을 바탕으로 한강유역을 빼앗는다.
신라가 차지한 한강상류 지역은 인구나 농토면에서 백제가 가진 한강하류보다 매력이 떨어졌다. 진흥왕은 2년 후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한강 지역을 신라에 다시 빼앗긴 성왕은 진흥왕에게 동맹의 배신을 따지지 않고 오히려 딸을 시집보내며 비밀히 가야 일본까지 연합하여 반전을 추진한다. 초기에는 백제에 유리한 싸움이었으나 성왕이 태자가 있는 옥천지역으로 위문하러 가다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군대의 매복에 걸러 비명횡사하면서 급변한다.
성왕의 목은 경주로 운반되어 신라 대신들이 지나다니는 계단 밑에 묻어 모독하였다 한다. 이로써 백제는 결혼과 군사동맹 상대에게 모든 것을 잃고 더욱이 성왕 시신의 극심한 모독까지 당해 원한은 극에 달했다.
성왕이 죽은 88년 후 의자왕의 복수혈전이 벌어진다. 의자왕은 642년 당항성을 고구려와 손을 잡고 포위하면서 합천의 대야성을 공격했다. 화성에 있는 당항성은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항구였으며 대야성은 경주까지는 100여 km 거리밖에 되지 않아 신라인들은 안전의 위협을 바로 느끼게 되었다.
대야성의 성주는 품석으로 김춘추의 큰 사위이며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의 핵심인물이었다. 일종의 낙하산 인사였는데 부하의 부인에게 성폭력을 휘두른다. 이 부하는 백제군의 윤충과 비밀 결탁하였으며 싸움이 벌어지나 성문을 열어 백제군이 밀려들어오게 되었다.
신라군은 무장해제당하여 일천여명이 죽임을 당한다. 김춘추의 딸은 살해되고 품석의 머리는 사비로 가져가 감옥의 통로에 묻고 죄수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하는 치욕을 안긴다.
현재 상주는 경북의 조그마한 소도시이나 신라초기에는 옥천 보은 영동 등을 관리하는 군사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가야세력의 사벌국이 신라로 포섭된 후 사벌주로 개명되어 지명은 보전되었다.
또한 신라왕실의 혈통이 박 씨 석 씨에서 김 씨로 바뀌는데 이 무렵 사벌주는 상주(上州)로 개명이 된다. 상(上)에는 위, 하늘, 임금의 뜻이 있음을 고려하면 신라가 이 지역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주 보은 무주등은 소백산맥의 끝이 잣아 들고 노령산맥으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김 씨 왕조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기반이었다. 이들 지역은 낙동강이 한강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의 연계지점이다.
그래서 이곳을 장악함이란 한강수계와 낙동강의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음이며 또한 경주 김 씨 왕들은 궁궐 경비병을 이들 지역에서 충당하였다.
옥천은 바로 이런 특성을 가진 지역과 연계된 신라왕실의 비밀이 숨겨있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런 곳을 성왕은 소수의 호위병만 이끌고 비밀히 이동을 하다 참혹한 경우를 당하였던 것이다.
소백•노령산맥의 연계지점과 관할하는 상주, 백과사전 자료
의자왕의 복수 전쟁터인 대야성은 지금의 합천으로 가야세력의 지역이었을 때 백제로 기울자 신라가 강제로 합병한 지역이다. 신라 발전기에 합천은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의 옛 가야지역을 컨트롤하는 대백제 전선의 핵심지역이었다. 그래서 지명도 큰 고을을 뜻하는 대야성(大耶城) 또는 대야주(大耶州)라 했다.
여기서 주(州)는 신라 시대 가장 큰 지방의 지명으로 현재의 도(道)에 해당한다. 현재 우리의 가장 큰 지명은 00도(道)이고 그다음으로 0주(州)이다. 도와 주는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글자이고 이 앞에 개별 지명 글자가 들어선다. 이 형식은 당나라 태종 시기의 지명 명명 방식이다.
우리 지명이 당나라 지명 형식과 많이 닮았는데 이는 중국의 지명문화의 영향이다. 이렇게 된 계기는 의자왕의 복수로 외통수로 몰린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과 연관이 큰데 그 설명은 다음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