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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Oct 09. 2024

적극적 교류와 황해도 지명 짓기

1. 성덕왕, 당나라와 관계 개선에 몰두하다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는 백제와 고구려 멸망으로 공동 목표가 사라지자 관계가 틀어지고 전쟁에 돌입했다. 옛 고구려 군대가 먼저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나당전쟁은 요동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가 669년 3월 압록강을 건너며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이후 전쟁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다가 신라가 임진강 지역에서 당의 군대에 크게 승리한 후 소강상태로 들어간다. 이런 상태가 676년까지 이어지다 736년 정식으로 종전이 되었다. 장장 67년간이나 전쟁 아닌 전쟁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 남북한의 6•25 전쟁 이후 정전상태와 닮아 있다. 

    

정전기간 중 당나라의 국내외 정세는 어떠하였을까? 당나라 내부는 측천무후의 등장과 퇴장 그리고 그녀를 닮아보려는 후속 여성 정치인의 활동과 몰락 등 정치적 혼란이 나타났다. 또한 서남쪽 국경 지역의 토번이 강성해져서 당나라의 수도까지 위협당한다. 


그리고 북쪽 국경 지역의 경우 유목족이 발흥하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당나라는 이들 지역에 군권과 행정권을 겸임한 절도사를 뒀으나 나중에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또한 동쪽 국경지역은 발해의 건국과 산동성 공격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국제정치 상황을 예의 주시한 성덕왕은 적극적으로 당나라와 관계개선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성덕왕의 치세는 35년이었는데 견당사를 46회나 보낸다. 성덕왕 이전시기 견당사(문무왕 14회, 신문왕 1회, 효소왕 1회)와 견줘봐도 성덕왕의 당나라와 관계개선에 적극성을 알 수 있다.   

  

그러자 당나라 현종은 신라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평양 이남의 땅을 정식으로 신라가 영유하도록 허락한다. 물론 당 현종의 셈법은 발해를 견제하고 이왕 차지할 수 없는 대동강 이남 옛 고구려 땅에 대한신라 영유권을 인정하는 모양새를 띈 것이다. 


이를 좀 더 살펴보면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게 패강 이남 땅을 준다는 공문(칙서)을 당나라에 와있던 신라사절 김사란에게 줘서 그가 귀국할 때 가져왔다.  그런데 이 공문을 받기 일 년 전에 발해가 산동반도를 공격하여 자사를 죽였으며 성덕왕이 발해를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당나라에 밝혔었다.     


왜 성덕왕은 당나라와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나? 그는 신라를 최전성기로 이끌었으나 그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모친이 10세 아버지는 유아시절 사망했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형인 효소왕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는데 조강지처와 강제 이혼하고 외삼촌의 딸과 재혼하였다. 


이 왕비도 오래 살지 못하였으며 이후 13년간 죽을 때까지 왕비를 두지 않았고 큰 아들도 일찍 죽었다. 이처럼 정치적 입지가 약한 성덕왕은 존재감 강화를 위해 대동강 이남 땅의 확보를 추진한다. 


이 문제 해결에 당나라 현종의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한 성덕왕은 적극적으로 관계해결에 나섰던 것이다. 침고로 당현종과 이름(융기)이 같아 친구 감정도 있었을 것 같다.   

        

2. 당나라와 발해를 대비하는 성벽을 쌓다


신라는 추가로 확보한 영토를 지키는 노력을 많이 하였는데 132년간이나 진행되었다. 즉 694년 효소왕 시절 송악(현 개성)에 성을 쌓는 것을 시작으로 748년 경덕왕 시절에는 패강(예성강으로 추축) 이남 지역에 관리를 보내 정찰을 실시하였으며 762년까지 황해도 지역에 6개의 성을 건설했다. 


782년 선덕왕 시절에는 대동강 이남지역에 패강진(군시요새)을 설치하며 남쪽의 주민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헌덕왕 시절 818~826년에 300리의 패강진 장성을 쌓아 발해의 남하를 막고 대동강 이남 땅의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여기서 패강진은 특별한데 관리 책임자는 초기에는 민정권 위주이었으나 9세기 후반에 들어서 신라의 농민반란이 빈번하여 지방통치가 어려워지자 군사권까지 겸임하게 된다. 


나중에 이 지역은 상급 지방행정기관인 한주(漢州)에서 분리되어 패서도 지명을 가지며 관리들은 지역의 세력가로 변신하여 고려 건국의 핵심역할을 했다.      


3. 황해도 이북 지역의 지명을 짓다


새로 확보한 영역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킴만이 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지명을 짓고 관장하여야 비로소 영유했다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황해도와 평안남도 일부 땅에 대해 고구려 지명을 폐지하고 신라식의 지명을 짓게 되는데 이 또한 132년간이나 소요되었다.


694년 효소왕은 우잠군을 이름 짓는데 현재의 황해도 금천군 지역이다. 경덕왕은 748~762년에 14개군•현의 이름을 짓는다. 황해도 영풍군(현재의 평산)과 2개 현, 해고군(현재의 연백)과 1개 현, 오관 군(현재의 서흥)과 1개 현, 폭지군(현재의 해주), 서암군(현재의 봉산) 그리고 평안남도의 중반군(현재의 안주)이다. 

 

그리고 헌덕왕 시절인 809~826년에 취성군과 토산현 당악현 송현현 등의 이름을 짓는데 이 현(縣)은 대동강 이남에 위치하였다.


                       새로 영토를 확보하고 지명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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