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반도에서 서해를 통과하여 중국으로 이어지는 교류 통로는 무역품의 거래뿐만 아니라 책의 유통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일종의 북로드(book road)라고 부를 수 있다. 실크로드는 동서양을 잇는 경제통로이었을 것 같으나 이 길 주변에 주둔했던 군대의 소요물품 거래 등 효과가 더 컸다.
고대 한반도 사람들은 선박 건조와 항해 기술이 뛰어났다. 이와 반해 중국인들의 경우 바다보다는 중국 내륙의 강이나 운하를 활용함에 더 치중하여 바다는 자연스럽게 한반도인들이 주도한 무대가 되었다.
중국인에 비해 서해를 활용하는 정도의 차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소질이 내재화되어 우리 선조는 뛰어난 바다 활용 유전인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바다의 이용 능력을 발휘하여 한반도에 있던 국가들은 5세기부터 중국으로부터 서적을 수입하여 국가 운영에 필요한 법령 제정, 교육제도 마련, 학문 진흥, 국사 편찬 등에 참고하였다.
이보다 이른 시기에 들어온 불교 서적은 처음에는 전수 수준이었으나 7세기 이후 새로운 종파를 형성할 만큼 불교학이 발전하여 우리 자체의 저술 활동이 이뤄졌다. 또한 유교 관련 서적과 과학 분야의 전문 서적까지 도입이 되었다.
잘 짜인 북로드의 효과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중국 강소성 내륙에 있는 양주지역에서 신라인이 중국화가의 작품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백거이 시집을 발표되기 전에 현금을 주고 매입하여 책이 나오면 바로 이 길을 통하여 신라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왕조시대 국가 지도자 그룹은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행정, 치안, 국방의 체계를 구축하고 감독하는 시스템 마련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지방의 행정사무를 맡아보는 관청 위치 결정, 도로망 구축, 군사 요충지 확보, 사찰 위치 선정 등도 상당히 중요한 과제였는데 이때 필요한 자료가 해당 지역의 지명이 표기된 지리와 인문 정보였다.
통일 신라는 크게 확장된 국가 영역에 대해 새로운 지방 행정 구역을 설정하고 관리하는 임무가 매우 중요해졌다. 지명은 그 지역에 대한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정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비탕으로 지역관리를 추진함에 있어 중국에서 수입한 지명 관련 서적을 참고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신라보다 더 큰 영역과 통일된 국가체제 관리의 경험이 풍부하여 중국의 지명 서적의 내용과 그들의 지방관리 시스템을 연구함은 자연스러운 이야기이다.
그럼 이에 해당하는 중국 고대의 지리 지명 관련 서적을 간단히 알아보자. 지명이 첫 등장하는 책은 주역으로 군사를 담당하는 원사라는 직책이 지명을 관장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산해경은 지리와 신화 및 역사가 어우러진 지리서로 수백 곳의 산과 하천이 등장한다.
수경주는 한나라 시대에 쓰인 수경에 북위 시대에 역도원이 풍부한 해설을 가미한 지리서로 강과 하천의 물길을 수록하였다. 이외에도 한서지리지, 삼국지 위지동이전, 수서 지리지, 당서 지리지 등이 있으며 특히 당나라 중기에 나온 원화 군현지는 지명서적의 표본이었다.
초기에 들어온 서적은 대나무나 나무에 글자를 표기한 형태였을 것이다. 종이는 한나라 때에 발명되어 당나라 시기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는데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7~9세기에 이르러서는 가볍고 운반이 쉬운 종이책이 주된 서적 형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도 8세기 중반에 목판 인쇄술을 이용하여 책을 만들었다. 인쇄 기술 발전으로 신라 내에서도 종이책이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는데 751년경 제작된 불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통일 신라의 경우 나라의 규모가 3배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지명과 지리 서적이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명이 표기된 지리지 없이 관리를 임명하거나 감독하기는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경덕왕 때에는 전국의 지명 450여 개를 일시에 개명하였기에 개명 전후 내용을 한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에도 지도를 제작하거나 지명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고구려는 628년 영류왕 시기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국가 영역이 그려진 봉역도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안장왕이 한강 유역 출신의 첫사랑 여인을 계백현에서 영접하였는데 이 현(縣)의 명칭을 왕봉현(현재의 행주)으로 개명하였으며 봉화를 밟혀 왕을 영접하였기에 일산의 어떤 지역의 명칭을 고봉으로 개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