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제목 : 삼한을 이름 짓다(2-1)
역사는 어떤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을 역사가의 눈으로 미래세대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한 옛이야기이다. 역사적 이야기가 일어난 특정 공간의 이름이 지명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이 지명을 활용하여 역사를 기록했다. 만일 지명이 없다면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고 기록할 수 있겠는가?
또한 역사가는 짧은 기간 좁은 지역의 이야기가 아나라 오랜 세월 넓은 지역에서 일어난 많고 복잡한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해야 했다. 이를 위해 특별한 구성 방식을 고안하여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지명은 역사서의 구성요소인 지리지에 기술하였는데 이 지리서는 특정 지명에 관계되는 자연 역사 사회 문화에 관한 정보를 조사하여 편찬한 문서이다. 이의 표본은 중국 동한시대의 역사서인 한서 지리지이며 기록 항목은 군현(郡縣) 명칭과 연혁, 토지, 인구 등이다.
삼국사기는 신라 멸망 210년 후인 1145년 고려 인종 임금 때에 편찬한 삼국 위주의 역사서이다. 총괄책임자는 김부식이고 편찬 사무를 맡은 8명(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언정, 박동계, 이황종, 최보우, 김영은)과 행정 사무 2명(정습범, 김충효)이 함께하였다. 김부식은 이들의 사고체계와 출신 등을 점검하여 선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본기 28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조시대의 역사를 서술한다고 생각해 보면 국가의 중심인 왕과 왕을 떠 받드는 관료와 조직 그리고 이들의 관계와 역할을 엮는 규정과 시스템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본기는 왕의 행적이며 지(志)는 제사, 음악, 복장, 직관, 옥기 등 국가의 행정 체제나 사회 규범을 열전은 큰 역할 하였던 인물들의 활약 기록이다. 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요 사건을 편제한 기록인데 삼국사기의 편찬 사유를 이 표에서 밝히고 있다.
‘중국 사서에 삼한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나 간략하고 우리 고기(古記)는 내용이 빈약하여 우리의 역사를 자세하게 기술할 필요가 있으며 왕과 신하 및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후세에 교훈을 알리고자 함’
참조한 책은 삼한고기(三韓古記), 고승전, 화랑세기, 계림잡전, 제왕연대력 등 우리 서적과 중국의 사서이다
지(志)는 9권이며 이중 지명을 기록한 지리지는 4권으로 편찬하였는데 3~5권은 신라의 지방행정단위 기준으로 지명과 고을 연혁을 기술하였으며 6권은 고구려 백제 지역의 지명 기록인데 단순히 이름만 나열하고 있다.
여기에는 삼한과 삼국시대 지명을 한자의 소리(音)와 뜻(訓)을 빌어 글자로 표기한 옛 우리말 지명과 신라 경덕왕의 전국 지명 개명 및 편찬 당시 고려 시대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또한 어느 지역의 지명인지 확인이 어려운 경우 별도로 목록 ‘미상지명(未詳地名)’을 만들어 첨부하였다.
삼국사기의 편찬 책임자인 김부식은 신라왕실의 후예로 삶의 기반은 경주이었으나 개경에서 관직생활을 하여 벼슬이 상주국, 낙랑군 개국후, 문하시중 등을 거친 고려 전기시대 출세와 권력과 명예를 모두 이룬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국 소동파 형제를 추앙하여 김부식 형제의 이름도 그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는 지식의 수준이 높아 옛날과 현재의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송나라로 출장을 가서 송 휘종으로부터 자치통감(중국 고대 16개 왕조 14백 년간 역사서)을 받아왔다. 죽은 후 아들 김돈중의 무신에 대한 모멸행위로 무신난이 일어나 부관참시의 치욕을 받았다.
이러한 김부식의 출신배경과 성향이 지리지 편찬에 영향을 끼쳐 신라 지명은 자세하게 고구려 백제 지명은 간략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의 영역은 삼한과 대동소이하다
삼한시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78개 국가 이름이 중국 진나라 시기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마한의 54 국가 이름, 변한과 진한의 각각 12개 국가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실제는 더 있었을 것이다. 이 나라 이름은 우리 순수말이었을 것이나 중국인이 한자를 이용하여 그들의 표현 방식으로 기록한 그 지역의 지명이며 우리 지명의 첫출발이다.
이들 78개 국가가 어디에 위치하였는지를 한반도 지도에 표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마한의 국가들은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경상남도 서부지역, 강원도 영서지역 일부, 황해도 지역에 존재하였으며 진한은 경상북도에 변한은 경상남도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이들 지역은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지역 일부를 제외한 대동강 이남 지역으로 통일 신라의 영역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이는 757년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개명할 때의 범위이기도 하다.
왕조시대는 국경의 면이 국경선이었다.
지금과 같이 지도제작 기술이 없던 고대에 정확한 경계선을 지도상에 그릴 수 없었다. 출국 행위도 교통요지의 검문소를 통과함으로써 나라를 나가는 행위가 이뤄졌다. 따라서 근대이전 국경 지역을 2차원의 평면 지도에 표기하면 선으로 표기할 수 없어 면(面)이 국경선이 되었다.
그래서 통일신라 시대에 대동강 이북에서 요동지역까지는 발해•당•신라의 접경지로 비록 넓은 지역이었으나 그 당시 세 나라의 경계면인 국경선으로 봐야 한다. 이 공간은 세 나라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삼한은 한민족 삶터의 상징이고 우리 민족의 생존영역의 다른 표현이다. 고려말 최영장군의 묘비명에 고려라는 말 대신에 삼한의 공신이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호에도 한(韓)을 사용하고 있다.
삼한의 위치(우리 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