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해영 Nov 06. 2024

경덕왕, 삼한 개명 준비(사례 파악)

삼한을 이름 짓다(2-2)

중국 왕조별 지명 개명 사례


신라 경덕왕은 지명 개명을 준비하기 위해 우선 중국의 사례를 파악하였다. 중국의 왕조를 기준으로 구분한다면 하나라부터 당나라까지로 지명 개명 사례를 2단계로 나눠 볼 수 있다. 제1단계는 어떤 지명을 다른 지명과 단순히 구분하는 시대로 하, 상, 주, 전한(前漢) 왕조 시대이다. 


이들 왕조는 중앙집권 체제가 아닌 봉건제(전한은 봉건제와 중앙집권제 병용)로 중앙정부가 전국을 직접 통제하지 않고 제후가 소관 지역을 관리함으로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중요지역의 지명만 관리하고 기타 지역은 그 필요성이 낮았다. 


그래서 지명에 동서남북, 상하, 좌우 등 방향을 가리키는 단어를 첨가하여 구분하여도 중앙왕조의 입장에서 행정에 큰 지장이 없었다. 하나라는 우임금이 부락 연맹체를 국가체제를 전환한 왕조로 전체 영역을  ‛0주라 형식으로 구분하고 9주(州)를 두었다. 


주는 중국 고대 대홍수 시대에서 살만한 땅을 가리켰으나 차차 지역의 통치기구로 변하여 지명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 또 9주는 중국을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인식이 되고 천하와 왕권을 상징하는 의미로 진화하였다. 

    

진(晉)은 위•촉•오 삼국을 통일한 왕조로 개별 나라가 한(漢) 왕조의 행정제도를 따르다 보니 중복된 지명이 많아졌다. 그래서 진왕조는 중복글자를 대체하여 개명의 효과를 얻으려 하였으나 왕조가 바로 망해 장강 중류 지역으로 쫓겨가 살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거주지역의 지명을 중원 지역의 이름 중에서 선정하여 명명하다 보니 장강지역에 중원의 지명이 대규모로 나타나 결과적으로 지명의 큰 혼란을 초래했다.  

    

다음은 2단계는 봉건제가 아닌 중앙집권제 왕조시대로 먼저 진(秦) 왕조는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제 통일 왕조로 국가 전 영역을  ‛00군(郡) 0현(縣) 형식으로 구획하여 지명을 명명하고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다음으로 수당(隋唐) 왕조 시기로 이때는 지명학의 성숙기였다. 특히 당 왕조는 장기간의 혼란을 수습한 후 복잡해진 지명의 표준화 작업을 시행했다. 즉 지명을 지을 때의 명명 기준, 지명에 사용하는 글자, 한자의 읽는 음 등의 기준을 마련하여 정리하였으며 동급 행정 단위의 중복 지명 줄이기, 유사한 음의 글자 없애기도 추진했다.     


지명을 대규모로 개명한 황제


진시황은 전국의 지방행정 체계를 봉건제(제후가 지역 관리)에서 군현제(황제가 지역 관리)로 바꿨다. 그는 550여 년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원인을 봉건제로 봤으며 주동자로 배후의 제후를 지목했다. 그래서 제후의 지방 지배를 배제하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직접 관리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봉건제 시대에서 방위사를 이용하여 지명을 구분하였는데 이를 군현제로 바꾸면서 군현의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명할 필요가 생겼다. 진시황은 개명할 때에 해당 지역에서 이미 잘 알려진 자연 인문 지리가 반영된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이러한 군현제는 중국 왕조시대 내내 그 방향을 유지하였다.   

       

지명 개명의 최악 사례는 신나라의 왕망이다. 신나라는 15년간 짧게 유지되었으나 전국지명의 1/2을 개명하였으며 횟수도 8~9년마다 개명하였다. 그 결과 91개 군(郡) 중 66개소를 1585 현(縣) 중 730 개소를 개명하였다. 그래도 개명의 형식을 규정하여 추진하였는데 아래와 같다. 


 ‛개명-XX군(郡 행정명칭),YY치(置 설치 시기), 망왈(莽曰 ZZ 왕망이 바꾼 내용)


또 스포츠팀의 느낌으로도 개명하였는데 예들 들면 대(隊 무리) 글자를 사용하여 개명한 바, 남양→하내후대, 영천→좌대, 홍롱→우대, 하동→좌대라고 명명하였으나 그 의미는 왕망만이 알 수 있었다. 반대 뜻으로 개명사례도 있었는데 


무(無)석→유(有)석, 부→부, 곡→곡, 우→우 등이다.     

     

수나라 양제도 대규모로 개명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시행한 주현제를 군현제로 바꾸면서 기본형식을 규정하였다. 


XX군(郡), 구치(旧置) YY‛ 

    

다음으로 당 태종은 주(州)를 개명하였고 당 현종 현(县)을 개명하였는데 지명의 규범화, 체계화 차원에서 통상 사용되고 쓰기 쉬운 글자를 사용하며 의미와 형태를 고려하고 지리 위치, 지형 형태에 근접하게 개명했다.

    

개명 사례 이해와 시사점    

   

왕조나 황제의 개명 성패를 살펴보면 봉건제 국가의 경우 하나라 우임금의 주(州)는 처음 정치적 의미에서 사용했으나 지방의 행정단위로 의미가 변하여 지명의 한 요소가 되었고 지금까지 존재한다.     


중앙집권제 시대의 경우 우선 진시황의 정책을 살펴보자. 그는 영토확장 과정에서 한 지방을 점령하면 기존 제후의 행정체제를 폐지하였다. 이들 지역의 신규 지명은 많이 알려진 전통 지명을 고려하여 명명하였으며 방위와 지명의 범위도 실제 지리와 연관성이 유지되도록 하였다. 즉 행정의 효과에 중점을 두되 지역민의 사용 측면도 고려하여 지명을 개명하다 보니 효과가 커서 왕조시대에 내내 흐름이 유지되었다.   

  

이에 반해 신나라를 건국한 왕망의 경우 대중 조작과 이미지 정치로 정권을 잡았음에도 자신을  준비된 황제로 착각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가 아닌 무엇을 할 것인지에 집착하였다. 그의 지명개명은 실패의 전형인데 개명 자체보다는 제도 개혁 일환으로 추진했다. 지명의 변천과 객관성을 고려 않고 형식주의적 허구적 개명이었다.  

    

그의 개혁은 봉건제 국가 모델인 주(周) 왕조를 모방하였으나 왕만을 지지했던 귀족과 백성들은 그의 주장이 더 나은 삶을 만들지 않음을 알고 반발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통치 철학 부재로 시도한 정책이 실패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흉노 정벌을 계획했다. 


이 계획에는 고구려와 한편이 되어 전쟁을 하는 내용이었으나 고구려에게 무시당하였다. 그럼에도 정벌을 실행했으나 실패하자 이들의 국명을 얕잡아 보는 의미를 갖는 글자를 개명하여 부르게 하였다.


구려→구려, 흉노선우→노선우

  

이후 수당 시기는 그전 왕조나 황제들의 개명 사례를 참고하여 지명 개명의 표준화와 효율화에 중점을 둬서 지명학이 성숙되는 시기로 자리 잡았다.    

      

이들의 사례를 통해 지명 개명은 창조가 아닌 객관적 수요에 따라야 하며 이름과 실제의 일치, 형식과 내용의 통일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명개명은 집권자의 개명 의도에서 출발하나 지역인의 반응이 지명 생명력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또한 대규모 개명은 위험하니 나눠서 단계적 추진이 바람직하고 강력한 리더십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명 후 왕조의 멸망 내지 정권의 급속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전 11화 신라는 지명 짓고 삼국사기는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