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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Nov 13. 2024

지명 개명, 국정 과제로 추진하다

삼한을 이름 짓다(2-3)

경덕왕, 전국 지명을 개명할 상황에 처해지다 


신라는 온 나라에 대한 지명개명을 통일 후 약 90년이 흐른 뒤 경덕왕이 실행했다. 옛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계층과 백성들에게 신라가 새로운 주인을 인식시키는 정책의 하나인 지명 개명을 통일 후  거의 한 세기나 지나서 시행했다. 왜 그랬을까?


먼저 개명의 적정 시기를 짐작해 보자.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신라와 당나라는 공동의 목표가 사라지자 두 나라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고토를 직접 통치하려 하려 하고 신라는 이를 용인할 수 없어 맞짱을 뜬다. 


예를 들면 당나라는 660년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현재의 나주를 대방주라고 지명을 짓자 신라도 이곳을 발라주라고 명명했다. 그러다가 두나라의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669년 겨울부터 전쟁에 돌입하고 676년까지 약 7~8년간의 전투를 치른다. 


676년 이후 전투 행위 없는 전쟁 즉 정전상태로 상황이 지속되다 736년 마침내 종전이 되었다. 두 나라의 대치 상태가 장장 67년이나 지속된 것이다. 당나라의 외견상 종전 명분은 장안에 와 있던 신라 사신의 죽음을 기리는 대가로 대동강 이남 땅을 신라영토로 인정하는 모양새였으나 내면에는 성덕왕의 냉철한 외교 노력과 당나라의 발해 견제를 위한 신라의 이용 목적이 숨어 있었다. 


어쨌든 735년 대동강 이남 땅을 신라의 영토로 공인하고 다음 해인 736년에 종전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연유인지 신라는 대동강 이남지역을 바로 점수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관리권을 넓혀 나갔다. 

748 경덕왕은 관리를 보내 패강(위치?) 이남지역을 정찰하고 762년 황해도 지역에  6개의 성을 설치했다. 


또한  748~762 이미 대동강 이남 지역 중 황해도 지역에 13개 군현 지명을 평안도 지역에 1개 군 지명을 지었다. 마침내 757년에는 전 국토의 개명을 실행했다. 종전 후 21년이 경과한 시기이며 신규 확보한 지역의 일부에 지명 명명 후 7년이 흐른 뒤이다. 긴 정전상태와 신규 확보지역의 관리도 순조롭지 않았던 것이다.

      경덕왕의 평안도지역 지명 명명(안주-중반군)


두 번째로 경덕왕의 입장이다.


경덕왕은 후계자 위치가 아닌 성덕왕의 3번째 아들이었으나 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정치적 지지기반이나 권위가 약해 신라 전성기를 이뤄낸 아버지와 조정의 신하들에게 자신의 존재감 나타낼 필요가 있었다. 


먼저 아버지처럼 당(唐)과 문화적 접근을 지속하였고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었으나 기대하는 효과를 못 봤으며 오히려 많은 예산 투입으로 재정 악화와 민심이반을 초래했다. 그래서 관리들에게 급료를 주지 않고 식읍(특정지역 관리권 인정)을 부활해 급료를 직접 조달하게 하였다. 관리들에게 왕의 존재감이 더 약해지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세 번째 신라 사회의 모순과 갈등 현상이 심해다.  

   

통일 후 90년이 흐르자 예전보다 커진 경제규모로 지배계급은 사치스러운 분위기가 만연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백성의 생활은 어려우지는 사회 현상이 초래되었다. 그러면서 귀족의 세력이 강대해고 반대로 왕권은 하락하였다.  


이는 신라 왕실의 특징인 골품제와도 연관이 크다. 김춘추부터 진골출신이 왕이 되고 나서부터 진골 귀족들은 왕을 군림자가 아닌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표자로 이해하고 왕의 권위를 인정치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탈 골품제를 추진할 경우 왕실 체제의 기본이 파괴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아이러니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당나라와의 관계에 몰두하면서 일본과 외교관계 단절되어 일본과 교역을 하던 남해 연안 상업세력의 손해가 심해졌다. 이와 반대로 조공무역 독점한 왕실과 친당세력의 이익은 날로 커졌다. 


그래서 경덕왕은 자신의 입지를 드높이고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는 여러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바라는 성과를 얻지 못하자 지명 개정에 전념하게 되었다.     

           

국정 주요 과제로 정하고 추진체제 마련    


지명개명의 주도층은 중국 문명에 사대적인 중앙과 지방의 권력 계층과 신라 사회의 지배 위치에 있는 세력이었다. 경덕왕은 즉위 6년 747년에 유교진흥을 위한 교육 연구기관인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으로 바꾸고 학생 교육을 전담하는 관리(박사와 조교)를 배치하여 지명개명의 이론을 닦고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개명의 책임자로 총리를 지명하다

748년 황해도 지역의 지명 짓기 경험을 바탕으로 경덕왕 14년 755년 7월에 개명 실행 책임자로 김기(金耆)를 시중(侍中 행정부 수반급)으로 임명하고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을 견제하면서 지명 개명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했다. 그는 지명과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바꾼 후 경덕왕 17년(758) 정월에 죽었다.     


조정의 부서중  조부(調府 지방 특산물 관리와 부역 업무 관할)를 지명개명의 전담기관으로 지정하고 명칭도 중국식인 대부(大府)로 바꿨으며 직원 2명(기존 15명)을 증원하였다.


지명 업무의 신속 정확한 실행을 위해 조부의 계층 구조(令영 장관-卿경 차관-大舍대사 문서 기록 담당-舍知사지 실무 통제-史사 실무자)와 지방의 담당부서인 주(州 총관), 군(郡 태수), 현(縣 현령)까지 점검하고 보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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