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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Nov 20. 2024

우리말 지명의 옛 모습을 더듬다

삼한을 이름 짓다(2-4)

신라식 빨리빨리?     


경덕왕은 즉위 16년 757년 2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전국지명 약 450개소를 한꺼번에 바꿨다. 중국의 개명사례를 검토하고 이미 잘 닦여진 중앙집권제의 행정체제를 정비하여 추진체제를 마련한 경덕왕은 드디어 개명을 실행했는데 소요 기간이 일 년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고속버스도 없던 시절인데 신라의 서울인 한반도 동쪽 끝 경주에서 서쪽 끝 서울까지 먼 거리를 사람이 직접 오가며 실행을 하였다. 


개명 이행 절차(왕의 지시 ↔ 계획수립 ↔ 결재 ↔ 지방 전달 ↔ 실행 ↔ 보고)도 많고 단계마다 검토와 협의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인데도 10개월 만에 완료하였다. 


현재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집 주소를 도로명으로 바꾸는 과정이 12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비용도 1조 원 이상이 소요되었음을 고려한다면 놀라운 속도이다.      


아마 업무 관계자들의 충분한 협조를 얻었을 것 같은데 이들에게 설명한 개명의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경덕왕은 당시 사용하던 지명과 바뀔 지명은 어떤 차이가 있을 거라고 주장했을까? 일반적으로 고유지명과 한식지명(중국식 지명)은 지향하는 바가 무척 다른 경향을 띤다.

      


삼국시대 우리말 지명을 문자로 표기할 때 우리의 글자가 없어 한자를 빌어 유사한 음의 한자로 기록하였다. 가끔은 한자의 뜻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과 교류가 깊어지고 중국의 전문서적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한자나 한문에 대한 식견이 높아져서 기존 고유 지명에 시용되는 한자의 수준과 내용의 껄끄러움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개명에 활용한 전문서적으로 유교경전(논어, 맹자, 역경, 시경, 예기, 춘추좌전, 주역정의, 상서)과 고전 및 사서(열자, 도덕경, 순자, 장자, 초사, 관자, 김루자, 사기, 후한서)를 들 수 있으며 수준 높고 멋있게 개명하자고 귀족과 사회 주도층에게 주장하였을 것이다. 이를 외부에 나타내는 개명의 명분으로 삼았다.   

  

개명에 더 정성을 들였던 지역은 중앙정부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강하게 미친 정치, 군사, 교통 요지이었으며 일부지역(웅주의 사림군 마산현, 황산군 진동현, 탕정군, 전주의 고산현, 임병군)은 기존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지명 개명을 통해 중앙의 귀족을 압박하고 지방 세력의 협조를 얻어 지방과 관계를 강화하고 귀족에게 자신의 존재감 표시하고자 함이 경덕왕의 지명개명의 숨겨진 의도였다.  

         

개명 전 우리말 지명의 모습 엿보기     


한자가 중국에서 우리에게 온 시기는 아주 오래되었으며 서적, 중국을 왕래하는 사람, 한반도로 이주한 중국인들을 통해 단편적으로 들어왔다. 삼국은 한자를 수용하여 사용할 때 처음에는 인명과 지명에 쓰고 그다음 문장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삼국이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수준도 나라마다 차이가 났다.     


그러면 개명 이전 삼국의 우리말 지명의 개략적인 느낌을 살펴보자. 여기서 거론한 사례는 지방행정체제인 주군현(州郡縣)중에서 757년 경덕왕이 당나라식으로 개명하여 현재에도 우리가 쓰고 있는 지명 중에서 선정하였다.    


먼저 지명의 글자 수는 1자~5자였다

삼한의 78개 나라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확대 발전하였는데 이들 나라는 수 백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점령, 합병, 연합 등의 방법을 통해 마침내 삼국의 체제로 녹여졌다. 


삼국의 체제로 포섭되는 방법에 따라 예전의 국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하기도 했으며 절충하는 형태도 있었음을 추정하면 지명의 글자 숫자가 일정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동래는 삼한시대의 거칠산국(居漆山國)이었는데 신라 영토가 된 후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으로 불렸다. 강원도 고성은 고구려가 달홀(達忽)이라 명명했으나 경덕왕이 고성군으로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두 번째로 우리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이다. 

하동은 삼한시대에 낙노국(樂奴國)이라 했는데 가야 시절 다사성(多沙城)이라 했고 백제 영향권 시기에는 한다사군(韓多沙郡)이라 불리었다. 한다사는 환하게 빛나는 따사로운 땅의 의미이다. 


영동군은 경덕왕 이전에 길동(吉同)이라 했는데 이두문으로 길(吉)은 영(永)이 된다. 또한 영동에 2개의 하천이 있어 이를 한자를 이용하여 나타낸 결과 이기도 하다(吉+二水=永), 김천 지례면은 지품천현(知品川縣)이 바뀐 것으로 깊다의 사투리 지푸다 에서 유래되었다.     


 셋째 지형의 생김새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이다. 마산 합포구(馬山 合浦區)는 골포(骨浦)가 변한 갓으로 마산만(馬山灣)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와 여러 골짜기 사이의 포구가 만들어진 모습을 딴 것이다.


넷째 글자 수를 줄인 지명이다,

진도(珍島)는 백제 시기 인진도군(因珍島郡)이었고 구례군(求禮郡)은 구차례현(仇次禮縣)이라 했는데 개명하면서 글자 수를 줄이고 유사한 음의 한자로 표기했다.


다섯 번째 한자의 이중 음을 사용한 경우이다. 

김포현(金浦縣)은 마한시기 속로불사국인데 장수왕이 검포현으로 개명했다. 검과 김은 같은 한자의 다른 음이다.


여섯 번째 삼국의 말과 인도어를 짐작할 수도 있는 경우도 있다.

보성군은 마한 시기 불운국(不雲國)을 백제 시기에 복홀군(伏忽郡)이라 했다. 대구(大邱)는 신라시기 달구화(達句火 크고 넓은 벌판)라 하였다. 여기서 홀과 불은 지명에 사용하였던 말이다.


나주시 반남면(潘南面)의 경우 백제 시기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을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 시절 반나로 부르다 경덕왕이 반남군으로 개명했다. 반나부리(半奈夫里, 發羅의 백제식 표기)는 인도 타밀어와 연관이 있다.


일곱 번째 쓰기 쉽고 수준 있는 한자로 바꾼 경우이다.

달이현(達已縣, 多已縣)은 다인면의 옛 이름인데 다(多)와 이(已)처럼 알기 쉬고 쓰기 쉬운 글자로 바꿨으며 무안군(務安郡)은 백제시기 물아혜군(勿阿兮郡)이라 했는데 수준 높은 글자로 대체한 사례이다.


여덟째 의미나 음을 전혀 짐작하기 어려운 지명도 있다.

경남 고성은 고자미동국이라 했는데 신라 영토로 속하면서 고자국(古資(自)國)이라 했다. 정선군(旌善郡)은 고구려 보장왕 때 이애현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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