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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밤 걷기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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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혜 Aug 25. 2024

밤 걷기

5

  하지만 가끔 소동이 일어났다. 성민과 결혼 얘기가 조금씩 오가던 때였다. 밤 열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대로라면 그때쯤엔 부모님이 잠자리에 들 무렵이어서 전화를 받기도 전에 마음이 불안했다. 예상대로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니 아빠가 없다. 집에 없어, 이 시간에.”

  엄마의 호흡이 거칠어 어딘가로 빠르게 걷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친척 집에 가고 있냐고 물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친척들에게는 엄마가 이미 다 전화해 봤지만 아빠의 소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주변을 다 뒤져도 아빠가 없다고,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서둘러 옷을 입고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급하게 야간 버스와 기차를 알아봤다. 시간표를 확인하면서 플랫폼으로 내려가던 중에 엄마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아빠는 고추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커먼 밤에 거길 왜 갔다냐. 쪼그려 앉아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니,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지.”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계속 눈물이 났는데 왜 우는지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빠가 베트남전쟁에 파병됐었다는 얘기를 들은 후로 나는 아빠가 아픈 것이 아니라 회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힘든 기억을 옅어지게 해 천천히 지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빠가 잊고 싶어 하는 기억이 무엇인지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고, 아빠가 그 군인에게 어떤 마음을 빚져 나를 데려왔는지도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모른 채로 아빠를 내내 불편해했다. 말이 없고, 웃지도 않고, 잠만 자는 사람으로 아빠를 기억해 왔다. 

  처음에는 성민도 우리 집 분위기를 이상하게 여겼다.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부모님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겨울이라 여섯 시밖에 안 됐는데도 한밤인 것처럼 어둑어둑했다. 시골길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 성민이 물었다. 

  “아버지랑 다퉜어? 나를 반대하셔?”

  당시에는 아빠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아서 나는 성민에게 아빠가 기억을 잃어 가고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성민은 아빠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아빠는 원래 좀 그런 사람이야.”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에 대해서도 성민에게 말하지 못했다. 성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망설여졌다. 나 자신도 어린 시절의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고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마가 해 준 말을 통해 아빠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내가 어떻게 엄마의 딸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지만 어릴 때부터 내가 나에게 느껴 왔던 혼란과 불안정한 마음은 해소되지 않았다. 전쟁 소식이 들려오거나 전쟁의 위협이 느껴지는 시기에는 쉽게 초조해지고 잠도 잘 못 잤다. 이런 상태에 대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급할 때면 병원에서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받아서 먹곤 했다. 아빠의 태도를 걱정하던 성민에게도 집안 분위기가 살갑지 않다고만 말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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