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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May 23. 2022

삶의 복잡성 #1

한글도 못 읽는 국민학생의 서울 상경기...

복잡계를 설명하는 여정에서 가끔 필자 얘기를 첨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인생도 복잡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남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였지만 1970년대 초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 과정의 막차를 타고 전 재산을 팔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많은 경우가 그렇듯이 우리 가족은 서울의 변두리 달동네였던 서울특별시 상계동에 정착하였다. 당시 상계동은 도시 빈민의 집단 거주지의 한 곳이었다. 지금은 노원구의 마들 평야에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고 있지만 1970년대 초에 상계동 주변은 그야말로 남새밭 천지였다. 시골의 우리 부락에서 내가 다니던 옥곡 국민학교까지는 거의 20리가 넘었다. 등교할 때에 형, 누나들과 함께 학교에 가야 했다. 1970년대에 시골에서 학교 가는 길은 한 눈 팔기 쉬운 등굣길이었지만 지각을 하면 벌을 받았기 때문에 서둘러 가야 했다. 


   언어와 문자는 인간의 독특한 사회적 진화의 산물인데 사회 속에서 언어와 문자 습득은 개인의 차이가 뚜렷하다. 지금은 거의 모든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지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거의 모든 저학년 학생들은 읽고 쓰지 못했다. 농촌에서 부잣집을 빼고 농부들은 너무 바빴으며, 농한기가 되어도 자식들의 공부에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공부는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다른 부모들과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학교에 가더라도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사실 지금 고백하지만 필자가 제대로 읽고 쓰게 된 것은 서울로 이사 와서 서울의 국민학교를 다니던 3학년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의 국민학교로 전학한 후 첫 국어 시간인데 선생님은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국어책을 한 구절씩 읽게 했다. 1970년대 초의 국민학교는 한 반의 학생이 거의 80~90명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읽기에 걸릴 확률이 매우 낮았지만, 아이들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느낀 그 초조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때 한글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조함은 현실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갑자기 선생님이 내 번호를 불렀다. 아마 내 번호는 눈에 띄는 번호였나 보다. 나는 일어섰고, 선생님은 국어책의 어디를 읽으라고 했지만 나는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그냥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그때의 창피함은 내가 스스로 글자를 터득하도록 하는 엄청난 동기를 부여했다. 사실 서울로 이사를 했지만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돌보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내가 이사 온 서울의 동네가 그 당시 유명한 달동네였던 상계동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상계동의 거의 모든 집은 하루하루 벌어서 살아가기 바빴고 공부는 사치인 곳이었다. 상계동 달동네는 거의 판잣집이었고 작은 집들이 더덕더덕 연이어 붙어 있었다. 요즘도 가끔 상계동을 방문하면 산비탈 높은 곳에 판잣집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무척 아프다. 나는 상계동을 방문할 때마다 일부러 판잣집들이 있는 달동네를 걸어보곤 한다. 내가 놀았던 동네는 없어지고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달동네 골목길을 걸으면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 딱지 치고 놀았던 친구들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나는 요즘도 글을 쓸 때 맞춤법이 틀리거나 띄어쓰기가 틀리곤 하는데 초등학교 때 제대로 한글을 터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읽기와 쓰기 습관은 어려서 형성되고 그 기억이 평생 남는가 보다. 읽기에서 창피함을 당한 나는 그 후에 반 친구들이 읽기를 하거나 옆에 잘 읽는 애들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보았다. 지금도 나는 좀 내성적이지만 그 당시 용기를 내어 가끔 옆 친구들에게 물어본 것은 나에게 기적적인 일이었다. 사실 물어보는 것보다 애들이 읽을 때 소리와 문자를 대응시켜보는 것을 스스로 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3학년이 지나자 나는 겨우 읽기를 할 수 있었지만 잘 쓰지는 못했다. 읽기와 쓰기의 늦둥이라고 할 수 있다. 읽기와 쓰기의 늦둥이가 지금은 대학교수이고 그것도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으니 배움에는 나이의 구별이 없나 보다. 오늘날 3학년 때 읽기와 쓰기를 잘못하면 아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라떼는 말이야(Latte is a hoarse)” 나와 같은 아이들이 많았다. 특히 시골에서 상경한 경우는 거의 비슷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언어는 사회에서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배울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신기하지 않은가? 나중에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산수를 스스로 깨우친 것도 얘기하겠다. 책에서 글자 빈도수 분포인 지프의 법칙은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소통의 문제에서 발현했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해 인가 시골의 우리 집 아래에 살고 있던 친구의 집에 서울에서 친척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어른들과 함께 우리 또래의 아이들도 같이 왔다. 어느 날 마을 어귀에서 서울 아이들을 만났을 때 그 언어적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필자는 어려서 두 번의 언어적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서울 아이가 말할 때 거의 모든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몇 가지 서울 말씨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려서 들은 말이라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계집애”라는 말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말의 뜻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 한두 마디의 모르는 단어가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시골아이들이 서울 아이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어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 번째 언어적 충격은 내가 할머니와 함께 하동의 섬진강 옆에 살고 있던 고모 댁을 방문했을 때였다. 우리 고모님은 나의 아버지와 터울이 많고 일찍이 우리 고향을 떠나서 경상남도의 하동으로 시집을 갔다. 고모님은 아마 10대 후반에 시집을 갔던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가 원래 하동 악양 (소설 토지에 나오는 그 악양) 근처에 살다가 광양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우리 고모는 하동으로 시집을 간 것 같다. 어느 날 고모님은 무슨 일을 하다가 팔을 부러뜨렸고 고모님의 뒷수발을 하기 위해서 할머니는 하동에 가야 했다. 어쩐 일인지 그때 어린 나를 데리고 갔다. 아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 6~7살쯤이었을 것이다. 고모님은 설이나 추석에 가끔 우리 집을 방문하곤 했지만 긴 시간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때의 방문이 나에게는 고모님과 사촌들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 마을 앞을 지나던 신작로에서 터덜거리는 버스를 타고 고개고개를 넘어서 하동에 도착했다. 고모님 댁에 도착하고 첫날 나는 하동 사람들이 하는 말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독특한 경상도 억양은 분명 전라도 말과 전혀 달랐다. 고모가 할머니에게 한 말인 "야가 몇 째 인교? 어무이..."와 같은 경상도 말은 그 때 처음 들었으며  전라도 말과 너무 달랐다. 내가 살던 광양과 하동은 섬진강을 경계로 매우 가까운 지역임에도 두 지역의 사투리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다. 오늘날은 미디어의 영향으로 사투리가 많이 해소되었지만 내가 어렸을 때 지역 사투리는 아주 심했다. 이러한 작은 언어적 차이, 억양의 차이가 너무나 독특한 언어의 지역적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면서 인류는 언어 습득 능력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단어에 규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언어의 발전은 과히 복잡계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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