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비 임비의 소소한 대화
임비 칫, 정말 추억이 다 아름다워? 난 초등학생 때 우리반 말라깽이한테 얻어 맞은 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아.
곰비 하하. 그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기분 나쁜 강도가 그때와는 좀 다를걸. 지금 생각하면 이해되는 면도 좀 있고. 나도 가끔 이불킥을 날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긴 하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추억은 아름답다고 하잖아. 나 역시 이 말에 동의하는 편이고. 자, 퀴즈.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 짝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임비 알지. 손때가 타지 않았으니까. 물건은 손때가 타면 변색되고, 사람은 내 맘같지 않아서 실망하거든. 대개는 풋풋했을 시절에 있었을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나 짝사랑은 내 손때를 타지 않았잖아.
곰비 오, 이런.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네. 그렇다면 여기에 더해서 이미 내 손을 거쳐 손때가 잔뜩 묻은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뭘까?
임비 오늘은 퀴즈하는 날이야? 그냥 지난 거니까 아름답지. 좀 더 리얼하게 말할까. 사라졌으니까. 죽거나 사라진 거는 그렇게 보여. 봐, 공룡도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가 뭐야?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으니까. 만약 호랑이가 완전히 사라졌어. 그렇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황홀한 동물로 좋아할 걸.
그런 거야. 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름답게 느껴지는 거야.
곰비 그냥 지나고 사라진 거라서? 그럼 이루기 무척 어려워 보이는 미래에 대한 상상은 왜 설레기만 하고 힘들지 않을까?
임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곰비 유명한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란 영화 봤어? 거기서 엄마가 평생 사랑으로 간직한 그 사랑은 며칠간의 사랑이었는지 기억해? 딱 4일. 낯선 이방인과 딱 4일간 한 사랑을 평생 간직했던 거야.
임비 그래서? 그건 욕망이 해소되지 못한, 아니 유예된 욕망이니까 아름답게 남은 거지. 아마 그 욕망을 끝까지 다 태웠다면 결국 검은재로 남았을 거고. 그렇다면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겠지.
곰비 맞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네가 말한 것들을 봐. 사라진 것, 유예된 욕망, 손때가 타지 않은 것, 그리고 네가 답하지 않은 미래의 설계에 가슴이 설레는 이유. 이것들의 공통점이 있어.
임비 공통점? 눈앞에 없는 거지.
곰비 바로 두 다리가 없다는 거야.
임비 뭐? 두 다리가 없다니 무슨 말이야.
곰비 다리가 없다는 얘기 하다보니 엉뚱한 이야기가 생각나네. 아이고, 입이 근질거려서 말해버려야겠다. 옛날에 우리 엄마는 귀신이 그렇게 무서웠대. 그래서 학교에서 늦게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나 밤에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화장실에서 귀신을 만날까봐 겁을 냈었대. 그랬더니 할머니가 엄마한테 귀신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줬는데, 그건 바로 다리가 없다는 거였대. 후후후. 그래서 귀신은 스스스으윽 나타나는데 모른 체 하면 되고, 사람은 저벅저벅 오는데, 사람이 진짜 무서운 동물이니까 냅다 도망치면 된다고 알려줬대. 귀신은 염력이 높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에 간섭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뭐든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사람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법이라고.
임비 너 지금 아름다운 추억과 미래에 대한 상상의 공통점을 다리가 없는 거라고 냅다 내질러놓고, 그 이유가 생각 안 나서 딴청부리는 거지. 에이, 이 너구리같은 놈아.
곰비 아냐. 내가 가끔 생각하던 문제야. 왜 추억은 아름다울까 하고. 지나간 추억이나 미래에 대한 상상은 현실에서 부딪치는 마찰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 그래서 다리가 없다고 한 거야.
현실에서는 부딪치고, 저항하고, 이겨내고, 극복하고. 또 좋아서 미치겠다가 문득 걱정되고, 드디어 이룬 것 같다가 무너지고, 밤새 코피 터지게 공부해야 하고, 상사한테 얻어터지고, 연인에게 불평이 날아오고, 사랑도 뭔가를 계속 채우고, 돌보고, 덜어내야 한단 말이지. 말하자면 ‘현재진행형’인 현재는 마찰력이 엄청 높아. 하지만 지난 과거나 다가올 미래는 모든 것이 우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야. 설령 부딪치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어 보이지만, 아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거든.
임비 참, 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맞는 것도 같고, 엉뚱한 것도 같고.
곰비 그래? 그렇게 엉뚱했어? 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엄마의 사랑은 그때도 지난 다음에도 영원히 아름답다고. 왜? 딱 나흘, 둘이 무슨 대단한 마찰이 있었겠어. 갈등? 노노. 황홀함과 애틋함만 있지. 오지 않은 미래와 같은 수준이었다고.
임비 와, 내가 딱 원하는 사랑인데. 이제부터 나도 그렇게 나흘씩만 미치도록 사랑 해볼까?
곰비 그럴 수 있다면 해보시든지. 난 추억이 되어 마찰력 없이 박제되기 전에 현재 일어나는 마찰의 고통이나 열감을 견디거나 즐기려고 노력해. 그래서 살아있으니 춥고, 덥고, 힘든 거라는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야. 내 경우, 이런 생각은 꽤 쓸모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