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 발광 엄마 데뷔

이 구역의 돌+아이는 나야 나

by 다시

남편은 육아휴직을 군데군데 쓰고 있다. 이번 일주일 그는 오프였다. 이제 6시간 뒤면 그는 다시 출근. 시아버지도 와계셔서, 이번 주는 꽤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잔치는 끝났고, 내일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물론 도움이 있지만, 이번 주에 너무 내 루틴을 잃으면, 다음 주에 혼자 둘을 보는 시간이 전보다 힘들게 느껴질 것 같아서 그랬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미지근한 물 한잔, 커피 몇 모금을 마시고, 유모차를 끌고 19개월 첫째와 공원에 갔다. 밤새 비가 온 터라 오랜만에 공기가 촉촉했다. 왠지 밤새 비 맞은 공원 미끄럼틀을 내 엉덩이로 청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공원에 도착하니 역시 나의 아기는 "어, 어" 하면서 미끄럼틀을 가리켰다. 혼자 미끄럼틀을 타보고 싶어 하는 아기를 내 품에 끌어안으며, 나는 두 번 연속 파란 미끄럼틀을 탔다. 거의 내 청바지로 미끄럼틀을 닦은 셈이다. 그래, 공원 놀이터를 전세 낸 듯 논 것이 몇 번인가. 이 정도의 봉사는 할 수 있지. 어차피 나는 지난 5년간 헬스케어 지망 입시생으로 살며 이미 수많은 봉사 시간을 쌓아오지 않았나. 내가 자주 오는 놀이터 미끄럼틀 청소 정도야.


둘째를 임신하고 있을 땐 첫째를 안고 걸어 다니거나 노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었는데, 이젠 첫째를 마음껏 안아줄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같이 미끄럼틀 탈 날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힘들어도 최대한 이 시간을 즐기자, 내 축축한 청바지로 오늘 공원 이웃들과 스몰토크 얘기 거리는 충분하구먼, 하고 생각하고 있는 차였다.


어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여성이 나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약간 늘어진 회색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뭐 나도 늘어진 티, 늘어진 잠바, 늘어진 바지를 입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디든 조용히 묻혀가는 내가, 누군가의 타깃이 되다니. 도대체 날 왜? 요전에 나한테 꼽을 주던 어떤 여자가 생각났다. 그 여자한테 말해줬어야 하는데. "보통 저를 눈꼴셔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낮거나 우울증이 있더라고요. 혹시 그러신 건 아니죠?" 나는 그 사람의 화려한 이력과 잘 관리된 피부 너머의 불안한 눈빛을 이미 느꼈었다. 하지만 나는 모임의 주최자를 나는 좋아했고, 그분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 적당한 웃는 얼굴과 공손한 멘트로 마무리했었다. 평생 그랬지만, 이민 오고 이과도 아니면서 의사를 해보겠다고 객기를 부린 이후로, 사실 난 더 움츠러들었고, 내 태도와 말투는 늘 아주 혹은 너무 공손했다.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인 듯.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 " 귀가 떨어질 것 같았다. 뭘 먹고 아침부터 저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지. "네가 내 남편과 40년을 잤지." 따발총 쏘듯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옆엔 요즘 밥 먹는 식탁에 자꾸 발을 올려놓아 날 미치게 하면서도, 미치도록 귀여운 내 첫째가 있었다.


분노가 차올랐다. 지난 34년, 문제는 일으키지 않고 살았다. 말도 안 되는 빚을 진 적도, 수험 생활을 하면서도 남편 커리어를 막은 적은 없었다. 내 인생 몇 년을 리스크 하면서 내린 결정들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일은 나름 최소화하며 살아왔다. 근데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모르는 나에게 내가 네 인생을 망쳤다는 거야? 이 여자를 병원에서 봤다면, 환자니까 그렇지, 하면서 옆에 사람과 적당한 농담을 하면서 넘어갔을 일이었다. 나는 내 검지 손가락을 머리 주변에서 한 바퀴 돌리면서 입 모양으로 "She's crazy, "라고 할 테고, 동료는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가 괜찮은지 약간의 진심과 귀찮음을 담아 물어볼 것이었다. 나는 마음 없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하고는 이런 형식적인 위로 보다는 나에게 무엇보다도 확실한 위로를 줄 젤리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병원이 아니었다.


"난 34살이고 앨버커키에 3년 전 이사 왔어." 나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난 너를 모르고 왜 생사람 잡고 야단이냐라고 했어야 했는데. 일단 그 사람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반박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두 딸의 엄마다. 이렇게 혼란한 세상에 부자도 아니고 직업도 없이 애를 둘씩이나 낳아놓고, 헛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절대 딸에게 수동적이고 조용하고 할 말 못 하는 아시아 여성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통을 했을 때처럼 온몸이 떨렸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지나가는 너한테 화풀이 들을 정도로 못 살진 않았다고, 공원에서 자주 마주치던 모두에게 특히 딸에게, 그리고 더 특히 나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던 것 같다. 다 똑똑히 들어두라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게다가 나는 오해를 받았는데,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던 나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의식의 수면으로 올라오면, 나는 그 기억으로 돌아가 학교가 이단에 손에 넘어가고 있다는 호들갑을 떨고 있고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토론하던 모두에게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단에 빠질 프로필이라는 것에 대한 자괴감, 사역자인 엄마의 밥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당혹감, 친구를 의심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 등 여러 마음과 생각에 빠져 나는 이단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었다.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오늘처럼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소리칠 것이다. 나를 의심하고, 측은히 여기고, 혹은 한심하게 여겼던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이단이 아니라고 말할 거고, 다들 엄한 사람 누명 씌울 시간에 본업이나 제대로 하라고 말할 거다.


과거의 기억들보다 훨씬 중요한, 내가 탄생시킨 나의 아기를 꽉 안으며 그 여자에게 소리쳤다. "내 아기 옆에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기만 해 봐!" 아기는 울먹거리다가 진정했다. 자기가 혼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 여자가 우리를 해치도록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아이도 느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어쩌면 딸도 그걸 느꼈기에 진정한 것일지도.


여자는 계속 포르티시시모로 소리쳤다. 그때 나오던 말 중에 하나가 넌 멍청하다는 류의 말이었고, 나는 의사가 될 거라고 말했다. 최상위 인재 아닌 거 나도 아는데, 내가 멍청하진 않지. 그것도 내가 늘 소리치고 싶은 말들 중 하나였다. 내가 말을 못 알아듣을 때 경멸의 눈빛을 보내던 환자나 프로바이더들이 속으로 생각할 법한 말이었다.


몇 분이었을까. 그 여자와 나는 서로에게 소리 지르다가, 나에게 눈인사는 하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던 동네 엄마가 끼어들면서 인지 아니면 그 여자가 지쳤는지, 여하튼 여자가 온 길을 되돌아갔다. 동네 엄마는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아마 처음엔 그냥 아는 사람끼리 싸운다고 생각했다가, 말을 들어보니 내가 이 여자를 모르는 것 같아 도와준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자기가 가는 길에 있기도 했고. 나는 다시 조용한 동네 아낙네로 돌아와 그 여자에게 웃으며 이름과 아이에 대해 물어봤다. 그리고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고 말했다. 나를 대단히 잘 변론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여자에게 분노했고, 사실이 아닌 것들을 반박했다. 그리고 그걸 공원 이웃들이 들었다. 가마니로 보이지 않았고, 실제 가마니도 아니었다. 만족감이 올라왔다.


몇몇 기억에 박제되어 있던 나의 할 말 못 하는 모습들을 털어낸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아이를 안고 놀이터를 조금 더 서성이다가,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바나나를 주었다. 나의 무용담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다들 이야기를 듣고는 위로해 주겠지만 집에 가면서 "이래서 학군 좋은 곳에 집을 사야 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일리 있지만, 나도 최고가 아닌 나의 최선이 지긋지긋 하긴 하지만, 사는 게 그런 걸 어쩌겠냔 말이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대단한 무용담처럼 으스대면서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 기록해 본다. 익명의 미국 시골 아줌마의 사자후가 누군가의 재미라도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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