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20. 카페 문을 열었다. 효상이가 보인다. 무언가 부탁할 게 있는가 보다. 소개팅하러 온 사람처럼 댄디한 슈트 차림이어서다. 다만,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화이트 톤 베스트와 시커먼 복사뼈가 다 드러나는 줄무늬 팬츠,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묻은 스니커즈가 효상이의 궁핍함을 말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는 중인데, 그래서 돈을 빌리러 왔나? 아니면 글 쓰는 것을 포기했나? 그래서 회사에 자리가 있나 부탁하러 왔나? 아니면 오래간만에 외출해 기분 전환하러 나왔나? 영업하면서 배운 게 있다. 상황을 짐작해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물어서 답을 듣는 게 중요하다. 실전은 다양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 상대해야 한다. 오랜 영업 생활을 통해서 이들을 만나보니 직관적으로 깨닫는 게 있다.
사람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의 예상은
대부분 틀린다.
21. 물론, 승기가 입이 닳도록 강조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예상해, 다가올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 또한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승기의 조언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승기가 만나는 사람은 기껏해야 학생이 전부다. 그런 만남은 실전이라 말하기 어렵다. 선생이 학생에게 떠드는 조언 중 인생에서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게 있기는 한가? 대학 생활을 내내, 많은 교수가 상식과 공정은 건강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교수의 조언처럼 살아보려 노력했다. 그런데 살아보니까 말이다. 상식과 공정을 지키려 할수록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나만 굳건히 지키면 뭐하나? 다른 사람은 상식과 공정 위에서 미련한 내 신념을 비웃는다. 대중매체는 상식과 공정을 무시하는 사람이 대부분 우리가 만나기 어려운, 가진 자라 이야기한다. 그렇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갈라치기한다. 처음에는 그리 믿었다. 가진 자는 상식과 공정을 무시해 온갖 더러운 일로 가지지 못한 자의 자리를 뺏어 간다고. 그렇기에 처음에는 내 신념을 비웃는 가진 자가 곧 대가를 치르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살아보니까 말이다.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가진 자를 만나기 어렵다. 그리고 정말 슬픈 사실은 말이다.
가지지 못한 자도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을 따라
공정과 상식을
조금씩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가진 자의 출발은
가지지 못한 자였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기준은 상대적이다.
22. ‘아빠 찬스’ 혹은 ‘엄마 찬스’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고위 공직자 사건이 한참 대학가를 들썩거렸다. 철석같이 공정과 상식을 믿었기에 이들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하여 효상이와 술을 자주 마셨다. 어찌하다 보니, 졸업 후 영업사원으로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상대적인 찬스'로 그들의 잇속[23]을 챙기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난 영업사원이다. 영업은 인맥의 중요성을 어떤 분야보다 강조한다. 인맥을 통해 성과를 내어 유지하는 게 일반적이다. 접대도 인맥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다. 선임들은 인맥관리가 진정한 능력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난 그 조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경쟁사와 비교해 자사 제품의 경쟁우위를 설파해 고객사를 설득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제품 사양보다 떡밥에만 관심을 보이는 거래처도 있다. 호형호제[24]하면서 얼마나 이들과 끈적한 관계를 유지하느냐가 내년에도 계약을 이어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이것도 상식과 공정을 기반으로 키운 능력인가? 이런 게 바로 '상대적 찬스'가 아닌가?
“형님, 내년에도 부탁합니다. 우리 끝까지 가야죠? 안 그래요? 제가 형님 영전[25]하는 길, 뒤에서 열심히 서포팅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불가피하게 제품의 가격을 상승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거짓말 안 합니다. 형님한테는 원가표 다 공개하잖아요. 예전처럼 진행했으면 해서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형님 사랑합니다!! 한 잔 제가 말아드리겠습니다!!”
23. 첫 접대 자리에서 선임이 고객과 나누었던 대화다. 그저 공짜로 비싼 술을 먹는다는 기쁨에 따라갔는데, 솔직히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수가 이직으로 인수인계할 때 비로소 그들의 대화를 이해했다.
“우현아, B 사의 부장님은 위스키 중 싱글몰트만 마셔. 보통 접대할 때는 글렌피딕 18년 산으로 하고, 재계약을 해야 하는 시점은 맥켈란 21년이나 25년으로 접대해.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잘 기억해. 가끔 다른 술을 먹자고 추천해보라고 하는데, 그게 일종의 시험이야. 그러니까 비슷한 가격대의 싱글몰트를 미리 숙지해. 듣보잡 술을 추천했다가 욕먹지 말고.
그리고 일단 직급을 불리는 것을 싫어해. 형님이라 부르면 좋아해. 우현이 너와는 나이 차가 좀 있기는 한데, 일단 상황 봐서 슬쩍 형님이라고 해봐. 좋아하면, 그때부터, 물론 진짜는 아니지만, 형, 동생 하면서 지낸다고 생각하면 돼.
절대로 사적으로 전화하면 안 된다. 하지만 부장님이 전화하면 반드시 받아라. 새벽이라도. 꼭. 우리 회사에 많은 매출을 담당하는 고객사야.
그리고 지금부터 민감한 내용을 말해야 하는데, 그동안, 이 형님과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어.
실제로 제시한 가격보다, 조금 더 비싼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해. 예를 들면, 실제로 개당 1500원이라면 납품할 때는 1530원이야. 그러면 30원의 차익이 우리 회사로 들어오잖아. 그러면 우린 그 30원의 차익을 부장님의 부인과 자녀 통장에 나눠서 순차적으로 넣어줘야 해. 회사 이름으로 이체하면 안 되고, 우리가 관리하는 대포 통장이 있어. 그 통장으로만 계좌이체해야 해. 물량이 워낙 크다 보니까 30원의 차익도 엄청난 금액이지. 물량을 늘리는 경우면 그에 따라 가격이 조정되고. 그리고 이도 저도 안 되면, 우리가 손해를 좀 봐야 해. 마진을 좀 줄여서라도 챙겨줘야 해.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된다.
그 사람 심기 건드려, 타사로 갈아타면, 회사의 막대한 손해야.”
24. 입사 후, 남자 직원만 득실득실해[26] 땀 냄새가 여름에 진동하는 영업부가 싫었다. 하지만, 기술직 영업은 제품의 특성상, 남자가 영업하는 게 계약될 확률이 높다. 땀 냄새로 진동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로 구성한 영업부는 영업 전략을 잘 활용한 사례라 믿어서다. 하지만, 사수의 인수인계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런 개소리를 영업 노하우라고 숙지해야 한다는 게 더 싫었다. 이게 무슨 공정과 상식인가? 퇴사까지 고민했었다. 내 신념에 비추어 이러한 방식은 공정과 상식에서 한참이나 벗어나는 행동이어서다.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사표를 썼다. 부장님이 호출했다. 퇴사할 거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 3년 차 아닌가? 정말 좋은 기회인데? 네 선임이 그동안 관리했던 어카운트가 얼마짜리인 줄 알아? 기회라고, 기회, 원래는 경력사원을 뽑아 대체하려 했어. 그리고 그게 맞아. 하지만 사수가 네게 기회를 줘보라고 하도 강력하게 주장해서, 자네는 운이 좋은 거야. 이런 기회가 흔해? 좋은 사수 덕분에, 자네가 그 기회를 잡은 거야. 진짜 좋은 기회.”
to be continued....
[23]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실속.
[24] 호형호제 (呼兄呼弟): 서로 형이니 아우니하고 부른다는 뜻으로, 매우 가까운 친구로 지냄을 일컫는 말. 왈형왈제.
[25] 영전(榮轉): 전보다 더 좋은 자리나 직위로 옮기는 일.
[26] 사람이나 동물 등이 많이 모여 어수선하게 자꾸 움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