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기도를 할까?
하스스톤이라는 게임을 아는지? 간단하게 말하면 카드로 하는 턴제 보드게임이다. 카드 게임이다 보니 이 게임은 운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현실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을 매우 순화한 표현이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매 턴 랜덤하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의 어느 정도 부분은 운이 통제를 하고, 다른 부분은 실력이 통제를 한다. 이걸 논증해야 하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이 게임에도 프로게이머가 있다는 건 실력이 관여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반증이겠다. 이 게임은 꽤 큰 규모의 대회가 열리기도 하는데, 하스스톤 프로게이머들은 대부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경기에 임한다. 같이 자세를 취해보자. 컴퓨터 혹은 태블릿 앞에 앉아서(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하는 게임이다.) 두 손을 깍지 껴 모으고, 팔꿈치를 책상에 댄다. 그리고 그 깍지 낀 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당신도 하스스톤 프로게이머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렇다. 이 게임의 프로게이머들은 항상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다. 하스스톤 전 프로게이머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른 게임 프로게이머들도 다 기도를 하고 있어요. 하스스톤은 단지 손이 안 바쁜 게임이니까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거예요!”
나는 달걀을 삶을 때 항상 기도를 한다. 달걀은 껍질을 까서 확인하기 전에는 노른자가 얼마나 삶아졌는지 확신할 수 없다. 계란의 크기는 날마다 다르고, 계란의 물에 넣기 전 온도도, 삶는 물의 양도 날마다 다르니 끓는 물에 넣는 시간이 같아도 매번 미세하게 다른 노른자가 나온다. 또, 내가 원하는 노른자도 날마다 다르니, 시간에 대한 계란 노른자 공식을 세워도 결국에는 기도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종교가 없는 나는 기도를 이럴 때 한다. 뭔가를 원하는데 내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을 때 나는 기도를 한다.
종교인들은 다른 식으로도 기도하는 걸 알고 있다. 내 친구 중엔 가톨릭 신자가 두 명 있다. 둘 다 성당을 열심히 다니는, 내 기준에서는 성실한 가톨릭 신자들이다. 여담이지만, 한 명은 밥을 먹기 전에 항상 기도를 하고, 다른 한 명은 밥을 먹기 전에 가끔 기도를 한다. 그 다른 한 명도 항상 기도를 하는 한 명이 기도를 한다면 언제나 같이 기도를 한다. 이 기도는 내가 달걀을 삶을 때 하는 기도와는 다르다. 이 친구들은 밥이 식후에 소화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것도 아니고 메이드 카페에서 그런 것처럼 맛있어지는 주문(내가 아는 한 주문은 ‘모에 모에 뀽’이 일반적이다.)을 외우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 그 기도는 초월적 존재와의 대화이다. 식전기도는 그 대화의 내용이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겠다. 하지만 나는 식전기도 같은 기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이번 글에서 말하는 기도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뭔가를 간절히 원할 때 그것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것’이다. 더 정확한 말로는 ‘소원을 빈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기도한다고 더 많이 하는 것 같기 때문에 글에서는 ‘기도한다’라고 하겠다.
기도는 언제 하는 걸까? 일단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이뤄지기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건 우리가 기도를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넘어가자. 또, 일의 결과가 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부분이 있거나 많아야 한다. 이럴 때 기도를 하면 좋다. 가장 기도가 하고 싶은 상황인 포커게임의 상황을 보자. 텍사스홀덤의 마지막 카드 오프닝 만을 남겨두고 있다. 나는 이미 3백만 원 내 판돈의 전부를 이 판에 걸었다. 상대는 한 명.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돈 전부를 걸었다. 우리는 이미 올인이기 때문에 각자의 카드를 오픈했다. 상대 손에는 Q와 10, 내 손에는 J와 10이 있다. 상대는 Q, 10 투페어, 나는 J, 10 투페어. 마지막 저 한 장이 J가 아니라면 난 지금 당장 내 숙소로 돌아가서 짐 싸고 집으로 돌아가야 된다.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제발 저 한 장이 J이기를. 이런 포커게임의 상황은 너무 명확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모든 것을 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만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럴 때도 기도한다. 나는 안중근. 지금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 위해서 총을 꺼내 들었다. 총을 본 경호원들이 나에게 달려들고 있다. 무를 생각도 없거니와 이제는 무를 수도 없다. 나는 조준한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내 자동권총을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수차례 손질했다. 어젯밤, 오늘 새벽, 김성백의 집에서 나서기 직전에도 손질했다. 사격도 수도 없이 연습했다. 지금 이 총, 지금 이 상황, 지금 내가 쏠 저 사람은 연습에서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반복했던 그 모습 그대로다. 난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기도한다. 제발 죽어라. 이 상황은 포커 게임과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예 없지 않다. 나는 연습을 열심히 할 수도 있었고, 총기수입을 열심히 할 수도 있었고, 마지막 순간에 조준을 잘할 수도 있으며, 방아쇠를 당기는 것조차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이 이루어질지는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남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혹은 뭔가를 더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을 때 기도한다.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