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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끌어당김의 법칙(2)

기도의 3가지 종류

by 장우성

기도가 실제로 일을 할까? 기도한 것이 이루어졌다면 생각할 수 있는 과정은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실제로 초월적인 힘/존재/의지가 내 기도를 듣고 내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둘째, 기도를 이루어주는 것은 나 자신으로, 기도를 하면서 나는 일을 성취하려는 의지를 반복해 재확인했고, 스스로 그 일을 이루어냈다. 셋째, 기도와는 상관없이 원래 이루어질 일이었기에 이루어졌다.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몇 번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나?


위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느냐는 당신이 정신적으로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덧붙이자면 서양사의 시대 기준에서 그렇다. 당신이 매우 신실한(동시에 신학적 의심과 그 의심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배제한) … 교의 신자라면 당신은 첫 번째 경우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서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고, 그 결정이 실제로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두 번째 경우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스스로 본인의 운명에 대해서 매우 작은 부분만 결정할 수 있고, 인간은 그 주어진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세 번째 경우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잘라 말하면, 첫 번째는 전근대의 정신, 두 번째는 근대의 정신, 세 번째는 후근대의 정신을 대표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기도에 대해 첫 번째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자연스러운 기도자, 두 번째는 근대 기도자, 세 번째는 후근대 기도자라고 부르자. 첫 번째 사람을 자연스러운 기도자라고 부르는 건 인간은 선사와 지금을 포함한 역사 기간 중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 동안 첫 번째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기도자와 근대 기도자는 기도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후근대 기도자는 기도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기도자와 근대 기도자는 기도를 할 것이고, 후근대 기도자는 기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글은 주로 자연스러운 기도자와 근대 기도자에 초점을 맞추겠다. 우리는 그 분석을 바탕으로 기도 중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형태인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겠다.


첫 번째, ‘초월적인 권능이 내 기도를 듣고 내 소원을 이루어주었다.’라고 이야기하는 자연스러운 기도자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기도자처럼 생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위 논의는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없으며, 이에 더해서 자연스러운 기도자와는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 시대에 신은 힘을 잃었다. 경제학자, 물리학자, 사회학자 등 누구도 신에 대해서 진지한 논의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학술적 제도권 안의 지식인들(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정체화하고 있는 순간에만)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신은 모양을 바꿔가며 아직 맹위를 떨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은 죽었지만, 지적 엘리트들의 논의 안에서만 죽었다. 신들은 아직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기 위해서 살아있다.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가본 적이 있는지?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가면, 수도권에 있거나 규모가 큰 절이라면 더더욱, 사람들의 소원이 적힌 연등이 치렁치렁 매달려있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대 속에는 사람들의 기원을 담은 푼돈이 널려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기도를 하고 있나? 절에 간 사람들은 부처님에게, 트레비 분수에 간 사람들은 트레비 분수의 요정, 천사 혹은 기독교적 신성에 기도를 하고 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초월적 권능을 완전히 믿고 있는 자연스러운 기도자라고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절에 가서 연등을 다는 사람에게 부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레비 분수에 천사 혹은 요정 혹은 예수가 동전을 던지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그 순간 파고들어 가 그 마음 안에서 간절히 되뇌고 있는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상주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원을 빌기 위해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가서 돈을 내고 연등을 달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기도자라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부분 자연스러운 기도자이다.


이제는 근대 기도자의 생각이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근대 기도자에게 기도는 자기암시다. 내 소원을 이루어주는 존재는 없다. 내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다. 근대 기도자의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시는 대학교에 간절히 입학하고 싶은 고등학생이다. 독서실 책상에 앉아 있는 그는 서울대학교에 너무나 가고 싶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고등학교 내신 점수가 좋지 않기에 수능에서 고득점을 해야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 너무나 가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능을 잘 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수능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는 더 이상 친구들과 점심시간에 같이 식후 축구를 즐기지도 않는다. 학교가 끝나고 코인노래방에 가지도 않는다. 노래가 부르고 싶어질까봐, 정신이 분산될까봐 노래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그에게는 서울대학교 진학이 지금 이 순간의 가장 큰 목표다. 그는 지금의 행복을 모두 대학교 진학 이후로 미뤄놓았다. 그는 항상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수능을 뛰어난 성적으로 풀어낸 후를 떠올리고 소망한다. 이 근대기도자는 간절히 서울대학교 진학을 바라고 있다. 그는 매 순간 기도를 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는 신이 그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소원을 들어줄 사람은 본인뿐이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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