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소설은 세 가지가 중요하다. 표현, 내용, 정신. 표현은 글로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이다. 가장 소설적인 요소다. 내용은 소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등장인물이 어쩌고 저쩌고 치고받는 이야기가 내용이다. 정신은 내용 기저에 흐르는 생각이다. 가장 덜 소설적인 요소다. 좋은 소설이 되려면 적어도 이 셋 중에 두 개 이상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소설은 어떤 게 강점인지?
소설 ‘설국’은 표현이 뛰어난 소설이다. 정신도 좋은 소설이다. 내용은 그닥 좋은 소설은 아니다. 그래서 이 서평은 내용은 별로 다루지 않고, 표현과 정신 위주로 다루는 게 좋겠다. 내용에 대한 설명이 적어서 책을 안 읽고 이 서평을 보면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 그리고 책을 같이 읽어나가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쓴 게 아니고 책을 읽으면서 썼다. 뒤에 내용을 모르고 그 부분에 대한 감상을 썼다. 마지막으로 이 서평에서 ‘주인공’은 시마무라이고, ‘나’는 이 글을 쓴 나, 장우성이고, ‘매춘부’는 소설에서의 ‘게이샤’를 로컬라이징한 것이다.
첫 문장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 문장은 책을 읽기 전에도 어디선가 들어봤다. 여행하다가 새로운 세계로 쏙 들어오는 느낌이다. 그 바로 뒤 짧은 문단에서 ‘ㅊ’이 들어가는 단어가 많이 들어와서, 겨울의 느낌이 더 잘 난다. ‘처녀’, ‘유리창’, ‘차가운’, ‘처녀’, ‘창문’. 짧은 문장인데 5번이나 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매우 추워하는 역장의 모습이 나오는 것도 소설의 겨울 배경 속으로 쑥 빠질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된다.
그다음에 ‘요코’가 나오는데 소설에서 그녀를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이후에도 ‘처녀’라고 부르는 것이 눈에 띈다. 일본어로도 그런지 모르지만, ‘처녀’라는 단어는 동정의 의미를 갖고 있어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또, 요코가 등장하자마자 자신의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 이미지는 전통적인 여성 혹은 어머니의 이미지다. 자신의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을 하지만 소설이 요코를 부르는 호칭이 ‘처녀’인 것이 재밌다.
게다가 직후에 주인공이 보고 있는 열차의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장면에서, 요코에게는 동행하는 남자가 있고, 매우 극진히 간호하고 있다는 묘사를 하면서도 꾸준히 요코를 처녀라고 부르는 것이 재밌다. 특히, 요코와 동행하는 남자와 요코, 둘의 행동으로만 보면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볼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건 모두 무시하고 처녀라고 부르는 게 자신의 희망을 가득 담은 호칭인 것 같다. 또, 요코의 무서울 정도의 아름다움에 주눅이 든 것이 관심이 가는 여자를 만난 젊은 남자, 내 친구들을 보는 것 같아서 주인공에게 마음이 간다. 요코를 훔쳐보면서 거의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차창 밖에 풍경과 차창에 비치는 요코의 모습이 섞이는 표현이 아름다워서 좋다.
고마코와의 이야기에서 먼저 재밌는 건 서양 무용에 대한 이야기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무용에 대한 글을 쓰고, 그 몽상 혹은 허위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주인공이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확 와닿는다. 그가 일없이 힘들게 산을 오르는 것(등산)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의미겠다. 이건 책을 다 읽고 덧붙이는 이야기지만, 고마코가 자기를 위해 하는 일을 헛수고라고 하면서도 고마코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비슷한 이야기겠다.
고마코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깨끗하다'는 표현이 계속 쓰이는 것이 인상 깊기도 하다. 고마코의 직업은 보통 깨끗한 것과는 잘 매칭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매춘부를 깨끗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통 매춘부의 직업 활동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런 사람은 별로 없다)이거나, 혹은 그 매춘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매춘은 그 행위 자체를 순수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이거나, 직업 너머의 인간을 보는 사람이거나, 매춘부라는 직업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고마코와 주인공의 관계는 아름답다. 거기엔 설렘, 순수, 매혹, 질투 등 사랑의 초기라면 있어야 하는 모든 요소가 있다. 훌쩍 떠나버리는 주인공이 이야기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항상 같이 있으면 부인이 된다. 부인은 이미 도쿄에 있다. 주인공이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되어 돌아왔을 때, 몇몇은 그대로였고, 몇몇은 바뀌었다. 고마코의 깨끗함과 순수함은 바뀌지 않았다. 둘 사이의 애매해서 아름다운 관계도 그대로였다. 고마코는 그때보다 더 적극적인 형태의 매춘부가 되어있었다. 계절은 겨울이 되었고, 여름에 다른 게이샤를 마다했던 주인공에 머릿속에는 요코가 한 켠 들어앉아 있다. 고마코와의 이야기를 나한테 말해준 뒤부터 요코를 더 이상 처녀라고 부르지 않는다. 요코라고 지칭한다. 열차 안에서 느꼈던 것 같은 매혹이 힘을 잃은 걸까? 아니면 고마코와의 관계 때문에 살짝 가려진 걸까? 아니면 그가 간호하고 있던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렇게 부를 필요가 없어진 걸까? 아니면 내가 처녀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마코가 샤미센을 연주하고 주인공이 듣는 장면은 둘 사이의 애매한 관계를 잘 그려낸다. 샤미센은 일본의 현악기인데 기타처럼 생겼다. 유튜브에서 악기의 소리를 듣고 감상하니까 더 장면이 잘 그려진다. 잘은 모르지만 되게 일본적인 소리가 난다. 고마코가 샤미센으로 연주하는 곡들이 모두 그 나름대로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고마코가 어렸을 때 배웠지만 제일 먼저 배운 노래는 아닌 ‘구로카미’는 주석에 적혀있기로는 ‘자신의 검은 머리를 빗어 내리면 질투심에 가슴 졸이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정을 노래한 짧은 속요’라고 한다. 난 이 곡에 대해 주석에 적힌 설명밖에 모르니 표면적인 이야기밖에 못할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안 하겠다. 난 소설의 이 부분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노래를 찾아 들을 정도로 열심은 아니다. 주석에 있는 설명을 보면 직관적으로 고마코와 주인공의 상황과 연관되는 것 같다.
주인공은 그냥 휙 도쿄로 돌아간다. 일반적으로 그때의 유부남, 여행자, 무위도식자가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갑자기 다음날 기차를 예약하고 도쿄로 돌아가 버린다. 고마코는 그를 배웅하러 기차역으로 같이 간다. 기차역에서 기차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 요코가 급히 와서 그 환자가 죽기 직전이라고 한다. 내가 앞에서 빼먹었지만, 그 환자는 고마코와 관계가 있다. 고마코가 매춘부가 된 것도 그 환자의 요양비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어쨌든, 고마코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주인공과 조금 더 있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고도 한다. 주인공이 먼저 기차에 탄다.
다시 시간이 지나서 가을이 왔고, 주인공은 고마코를 보러 다시 그 지방에 간다. 겨울 때와는 달리 가을이 될 때는 그 계절 속으로 쑥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이건 좀 아쉽다. 사실 계절이 바뀐 건지도 좀 늦게 알아챘다. 나방이 알을 가을에 까는지 늦여름에 까는지 겨울에 까는지 내가 알게 뭐람.
계절은 바뀌었지만, 관계가 많이 바뀌진 않았다. 주인공과 고마코는 비슷한 대화를 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여전히 고마코는 더 적극적이고, 주인공은 거리를 두면서도 좋아한다. 고마코가 아마 몸에 열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몸에 열이 많이 나는 사람을 사용한 비유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내가 잘 아는 사람도 몸에 열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소설을 쓴다면 이 비유를 사용하고 싶다.
고마코가 4년 동안 1년에 한 번 자기를 보러 오라고 하지만, 나에겐 4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주인공도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이 둘 사이에 그렇게 긴 시간의 약속을 하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요코는 죽은 환자의 무덤에 매일 성묘를 간다고 한다. 그것도 부질없게 느껴진다. 주인공은 부질없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부질없는 걸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도구적인 걸 싫어한다.
온천장에서 고마코를 태워다가 은하수를 보고 불난 집을 보러 가는 시퀀스가 소설의 마지막이다. 표현이 아름다운 아주 좋은 부분이다. 이 소설은 표현을 잘한다. 하지만 나는 감동을 표현하는 것엔 좀 약하다. 감동을 잘 받지 않기도 한다. 내가 좀 더 잘 표현을 잘할 수 있었다면, 이 부분이 얼마나 좋은 부분인지 잘 설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없었을지도 모른다. 웃기는 얘기지만, 멋진 표현을 쓰려고 시도한 수많은 글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대표적으로는 왓챠피디아 한 줄 평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사람들도 설국의 마지막 부분을 감명 깊게 읽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No offense.
마지막에 요코는 왜 죽어야 했을까? 왜 작가가 요코를 죽였을까? 여러 후보들이 떠오르지만 그걸 고민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적어보려고 해도 헛소리 같아서 적고 싶지가 않다. 어쩌면 그냥 요코가 죽는 게 깔끔한 결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고마코는 불난 집을 보러 가고 주인공은 도쿄로 가면 안 됐을까? 도쿄로 갈 때 요코를 같이 태우고 갔으면 안 됐을까? 당연히 안 될 건 없다. 그러면 이 작가가 노벨상을 못 받았을까? 받았을 것 같다.
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버전으로 이 책을 읽었는데, 책 뒷 표지에 이런 글이 있다. ‘시마무라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두 여인, 고마코와 요코에게 동시에 끌린다. 이 두 여인은 시마무라를 현실 세계로 이끄는 열쇠 같은 존재들이지만, 시마무라가 지닌 허무의 벽에 튕겨져 나올 뿐이다.’ 사람마다 책을 다르게 읽는다. 고마코와 요코가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는 건 너무 동의한다. 근데 열심히 살아가나? 당연히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간다’고 했으니 열정적으로 사랑하니까 열심히 사는 거지~라고 말하는 건 안 통한다. 그러면 왜 똑같은 말을 두 번 해? 내가 느끼기엔 이 둘은 열정적으로 사랑하기는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지는 않는다.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하는 일에 별로 몰입하지 않는 것 같다. 피상적으로 느껴진다. 왜 그런지도 더 길게 쓰고 싶지만, 손가락이 아파서 더 못 쓰겠다. 칼에 베어서 손가락을 꿰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