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 이야기가 완전히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아, 그냥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여기고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감당할 수 있는 두려움으로, 이것은 익숙해지거나 어떤 시도를 통해 극복이 되는 부류예요. 이런 두려움은 극복을 위한 도전을 하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할 수 있지요. 하지만 여기서 제가 다루는 두려움은 두 번째 타입으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에요. 이러한 두려움은 극복하려는 시도를 할수록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도가 오히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망가트리게 돼요. 자신의 두려움이 두 타입 중 어디에 속하는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거예요. 이 점을 유의하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야기를 이어갈게요. 오늘의 글은 두려움과 관련해서 제가 세운 가설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생각패턴의 본질에는 나를 지키려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억지로 내 머릿속에다가 이에 반하는 생각을 집어넣어 봤자 두려움이라는 강력한 생명의 힘을 이겨낼 수 없으므로 금방 그 인위적인 생각은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저는 두려움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봤어요.
가설 1.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는 심리적 증상은 그것을 고치려고 임의로 추가한 ‘언어로 된 생각’에 의해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심리적 증상이란 생각패턴과 같은 부류를 통틀어서 말하는 거예요. 균형을 잃은 그런 머릿속 생각들이요. 이 가설은 근본적으로 ‘언어로 하는 생각’을 통해 생각 패턴과 심리적 증상을 없애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즉, 나란 존재에서 두려움과 관련된 것만큼은 내 통제 영역 바깥에 있고, 그것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거라고도 볼 수 있어요. 생각이 곧 나의 주체성이자 통제성이라면 이것이 통하지 않는 대상인 셈이니까요. 두려움은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의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고, 그 두려움이 뒷받침하는 생각이 가장 강하므로 이 생각에 반하는 생각을 억지로 넣어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되는 거죠. 즉, 내가 심리적 증상들을 말로 하는 생각만으로 극복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실패할 것이 분명해요. ‘괜찮아.’, ‘사실 네 생각과는 달리 이거 별거 아냐.’와 같은 말들을 아무리 자신에게 해줘도 별로 효과가 없다는 거예요.
사실 이 가설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단지 저는 제가 살면서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이런 가설을 세운 것일 뿐이에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아닌데. 나는 언어로 된 생각만으로 심리적 증상을 극복했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맞을 수도 있고 제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적어도 20년 동안 이런 방식을 시도해 보았던 그리고 실패했던 저의 세계에서는 이 가설이 진실이었어요. 그러므로 적어도 이 책에서는 이 가설을 진실로서 밀고 나갈 거예요.
이 가설을 떠올린 후에 머릿속 언어가 통하지 않으므로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 증상을 극복해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머리가 아닌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해보았고, 근력 운동을 해서 몸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해 봤어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조차도 일시적인 효과는 있었을지 몰라도 역시나 생각 패턴은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저에게 강한 힘을 끼쳤어요. 저는 언어로 하는 생각을 제외한 다른 여러 방법들을 계속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생각했어요. 사실 어딘가에 극복할 방법이 분명 있는데 내가 그것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일까? 그러니까 나는 계속해서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뭔가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어요. 그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심리적 증상을 극복하려고 했을 때 저에게는 증상을 고치겠다는 명백한 의도가 있었어요. 이 생각패턴들에 휘둘리지 않겠다. 너희들은 그저 생각일 뿐이고 잘못된 것들이다. 나는 너희를 보고 크게 웃으며 균형을 찾겠다. 더 이상 생각패턴을 떠올려도 두렵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려는 목표가 있었죠. 이 의도 또는 의지를 가진 채로 시도할 것들을 찾고, 어떤 것을 선택했고, 그것을 하면서도 저는 심리적 증상에 좀 변화가 생겼는지를 끝임 없이 체크했어요. 책도 참 많이 읽었죠. 어떻게든 증상을 극복하겠다고 여러 분야의 책들을 열심히 읽었어요. 어떻게든 극복하겠다. 그런 마음으로요. 그런데 이것을 내 안의 두려움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아요. ‘응? 뭐야. 두려움과 연결된 증상을 없애보려고 그런 것들을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이 증상들은 내가 너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이 증상들이 없으면 넌 위험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아무리 다른 것을 해도 소용없어. 난 없애지 않을 거야.’
즉 제가 증상을 없애려는 의도 내지 의지를 가지고 어떤 것을 하면 머리는 제가 심리적 증상을 없애려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돼요. 그러므로 제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것에 증상을 없애려는 의도가 있다면 머릿속 두려움은 이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고, 두려움 입장에서는 역시나 증상이 없어지면 제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하므로 증상이 사라지는 것을 막게 돼요. 두려움 입장에서는 그것이 저를 진정 돕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를 통해 저는 다음과 같은 굉장히 무서운 두 번째 가설을 세울 수 있었어요.
가설 2. 두려움과 관련된 심리적 증상을 없애려는, 극복하려는 의도 내지 의지를 가진 채로는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증상을 극복할 수 없다.
내가 그것을 극복하려는, 그것을 없애려는 생각인 의도를 갖고 무언가를 시도하고 노력하게 되면 그 행위를 하는 동안 두려움은 이런 의도와는 거꾸로 나를 지키기 위해 절대로 증상이 없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내가 증상을 없애지 못하게 내 의도를 계속해서 방해하는 거예요. 이 가설은 결국 내가 증상을 없애려고 한다면 내가 무엇을 하든지 절대로 증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해요. 오랜 시간 동안 증상을 없애기 위해, 극복하기 위해, 고치기 위해 저는 수많은 시도와 노력들을 했었요. 근력 운동도 해보고, 달리기도 해 보고, 춤도 배워 보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려고도 해 보고, 기타도 쳐보고, 생각을 바꿔보려고도 해 보고, 나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사람들을 인터넷 카페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심리학, 철학, 트라우마와 관련된 책을 읽어보기도 하고, 심리 상담가를 찾아가 보기도 했어요. 어떤 것은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거의 모든 시도들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죠. 그리고 이 모든 시도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가설 2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그것을 고치려는 명백한 의도를 갖고 모든 시도들을 했으니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달리기를 하면서도 이렇게 달리면 이 증상이 고쳐질까, 춤을 추면서도 춤을 추면 증상이 없어질까, 새로운 사람을 사귀면서도 이 사람을 통해 내 증상이 좀 나아질까라고 생각하며 항상 증상을 체크하고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가설 2를 피해보자고 ‘아, 사실 내가 그걸 고치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다른 걸 해보려는 것뿐이야 정말이야 믿어줘.’라고 말해봤자, 내게는 그럴 의도가 없다고 말해봤자 결국 내 머리인데, 내 머리를 내가 속일 수는 없잖아요?
가설 2를 몰랐을 때 저는 만화 주인공처럼 괴로움을 견디며 ‘강력하고 굳은 의지’로 거대한 적인 증상이 저를 괴롭혀도 이 상태 그대로 상황에 부딪히며 증상과 싸워서 이겨내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할수록 저의 예민해졌던 신경이 점점 더 쇠약해져 버려서 저는 더 약해지고 아픈 상태가 되어버렸지요. 증상은 이것을 경쟁자처럼 생각하며 죽을힘을 다해서 ‘강한 의지’로 맞서 싸운다고 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강한 의지는 증상을 넘어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를 약하게 만들었죠.
‘의지’로 극복할 수 없었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들도 다 실패했기 때문에 저는 완전히 좌절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좌절 속에서 저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죠.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렇다면 혹시 증상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해 버리면 증상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포기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놓아줌과 포기로 인해 증상이 떠나가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죠. 처음에는 이런 포기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듯 보였지만 이내 증상은 다시 자기 힘을 찾았고 결국 저는 포기로도 증상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어요.
‘언어로 된 생각’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고 ‘포기’도 아니라면, 이제 저에게 남은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렇게 저는 완전한 절망 속으로 빠지게 되었죠. 가설 1과 가설 2가 맞다면 저에게는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머릿속 언어로 하는 생각으로도 안 되고, 의지를 갖고 어떤 다른 것을 해도 안 된다면 결국 심리적 증상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죠.
이런 절망 속에서 과연 저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아니, 정말 뭘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걸까요? 이런 괴로운 상황 속에서 저는 제가 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건 바로 ‘심리적 증상을 극복하는 것을 포기하기’였죠. 어? 방금 전에 포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었냐고요? 네. 말했었죠. 하지만 그건 말하자면 겉보기 포기, 가짜 포기였어요. 혹시 포기하면 포기를 통해 증상이 나아지지 않을까, 포기를 통해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은근한 기대가 숨겨져 있던 포기였죠. 그런데 지금 말하는 포기는 그런 가짜 포기가 아니라 진짜 포기를 말하는 거예요. 정말로 심리적 증상을 극복하는 것을 포기하는 거지요. “에? 그건 그냥 두려움에게 지는 거잖아요? 심리적 증상에게 지는 거잖아요? 그렇게 그냥 포기해 버리면 그 증상이 주는 괴로움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데요? 그 증상 때문에 삶을 정상적으로, 제대로 살 수가 없는데 그럼 이대로 계속 살라는 말인가요?” 그래요. 어쩌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이 질문에는 두 개의 답변이 필요하죠. 일단 두려움이 만드는 증상을 극복하는 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두려움에게, 증상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증상 극복을 포기한다고 해서, 증상을 없애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런 변화 없이 그 증상 그대로 여전히 살아가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 다음 글부터는 이 두 답변에 대해서 차근차근 하나씩 알아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