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관련된 심리적 증상을 극복하는 것을 포기한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요?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 장애물을 만나면 맞서 싸워서 이기라고 배웠어요. 맞아요. 삶에서 만나게 되는 웬만한 장애물들은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맞아요. 하지만 적어도 저는 이 두려움과 관련된 증상에 한해서만큼은 이런 일반적인 시각을 포기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극복을 포기하면, 싸워서 이기는 걸 포기하면 지는 것 아니에요?라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네요. 네. 지는 것이 아니에요. 적어도 이 경우만큼은 지는 게 아니에요. 그럼 지금부터 왜 지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말해볼게요.
앞선 글에서 저는 내가 증상을 고치려 하는 의도가 있다면 증상을 고칠 수 없다는 가설에 대해 말했어요.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나를 지키려는 내 안의 두려움의 감시를 피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에 뭔가 좀 이상한 것이 있지 않나요? 내가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의 감시를 피한다? 저는 마치 내 머릿속 두려움을 내가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었어요.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머릿속으로 말해줘도 내 말을 듣지 않고 심리적 증상을 표출해 내는 내 머리는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해요. 나의 통제 바깥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로 그런 걸까요? 내 마음대로 되는 머리의 생각만이 진정한 나가 표출하는 아웃풋이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머리의 생각은 진정한 나가 아닌 존재가 표출하는 아웃풋인 걸까요?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웃풋은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앞의 말들에 두려움을 넣어서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어요.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심리적 증상을 만들어내는 ‘두려움’은 정말 내가 아닌 걸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존재이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용기라는 말을 들어오면서 은연중에 두려움을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해 배척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 같아요. ‘두려움’ 그리고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 내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심리적 증상'은 진정한 내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비정상적인 요소라고 여겨왔던 거예요. 그런데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들은 사실 저를 지켜주는 요소들이었어요. 저는 생각패턴을 통해서 비록 현재를 망가뜨렸지만 그래도 이로 인해 미래의 더 큰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어요. 두려움은 생각 패턴을 사용해서 저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지 않아도 될 때에도 미련하고 바보스럽지만 두려움은 자기 나름에서는 최선을 다해 제게 신호를 주며 저의 생명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제 생명이 곧 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더라도 어쩌면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이 ‘두려움’ 일지도 몰라요. 예를 들어 심장 박동수가 내 생각대로 바뀐다면 생명이 위험할 거예요.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장 박동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는 내 안의 시스템이 나가 아닌 것은 아니죠. 즉, 내 말을 안 듣는다고, 심지어 바보처럼 작동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아닌 것은 아닌 거예요. 수학 문제를 풀 수 있고, 소설을 쓸 수 있고, 합리적이며 고도의 사고를 할 수 있는 생각만이 진정한 나가 아니라 두려워서 벌벌 떨고 때로는 비굴해지기도 하며, 도망치면서 못나 보이기도 하는 나도 진정한 나인 것이죠. 이것은 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니까요. 정리하면 '내 마음대로 되는 나'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 즉,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나', 이 두 개의 나가 동등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바로 자신인 거예요. 둘 다 진정한 나인 거죠.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증상들은 이 두 개의 나 중에 후자에 있는 나가 표출해 내는 행위라고 볼 수 있어요. 이것이 가설 3이에요.
가설 3. 두려움과 관련된 증상도 진정한 내가 표출해 내는 행위이다.
사실 두려움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여러 감정들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너무 기뻐서 웃음을 참지 못한다든가, 아니면 너무 슬퍼서 울음을 참지 못한다든가, 너무 화가 나서 열이 오른다든가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그래도 이런 감정들은 어느 정도 나라고 여기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기쁜 거고 내가 슬픈 거고 내가 화가 나는 거, 이런 감정들로 인해 내 생각대로 내가 움직여지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그것도 나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일단 저의 경우에 이런 감정으로 인해 적어도 제 삶이 흔들릴 정도로 고통을 받지는 않았거든요. 기쁨 때문에 웃는 것은 좋았고, 슬퍼서 우는 것은 당연하고 뭔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화가 날 때는 힘들었지만 그 순간뿐인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두려움은 뭔가 달랐어요. 두려움과 연결된 저의 반응들은 뭔가 강렬했고 지속성이 있었으며 어떤 상황마다 다시 계속해서 나타났어요. 게다가 제가 두려워하는 대상들은 굉장히 개인적인 것들로서, 제가 그것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뭔가 잘못된 것이고 제가 고쳐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죠. 무엇보다 두려움과 관련된 것들은 저를 고통스럽게 했으며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했어요. 이러한 점들이 다른 감정들과는 다르게 두려움 역시 저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두려움도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것 역시 진정한 나임을 받아들이기 되면 이제 두려움과 싸우기를 포기할 수 있어요. 진정한 나와는 싸우고 말고 하는 개념이 성립이 되지 않으니까요. 내가 나와 싸운다는 말은 여기에는 속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이기고 지고 할 것도 없어요. 간혹 사람들은 자신과 싸워서 이겼다고 말하기도 해요. 밤늦게까지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인내심을 갖고 공부했고, 내 몸에 근육을 만들기 위해 힘들지만 팔 굽혀 펴기를 한 개라도 더 했다고 하죠. 그렇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해요. 그래요. 이런 싸움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것들은 자신의 생명과 싸운 것은 아니에요.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자신의 어떤 욕구와 싸운 것뿐이지 자신의 생명 자체와 싸운 것은 아니죠. 하지만 두려움과 싸우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싸우려는 행위예요. 자신의 생명, 또 다른 진정한 나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뭘까요? 내 생명의 힘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내가 이기는 걸까요? 아니요. 그렇게 되면 방금 말한 것처럼 내 생명이 더 위험해져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싸우고, 이기고, 지고, 이런 개념이 속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과 관련된 증상의 극복을 포기하더라도 지는 것이 아니게 돼요. 적어도 이 경우만큼은 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우리는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포기해도 괜찮아요. 여기서 포기하는 것은 패배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일단은요. 지금 그 두려움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괴롭게 한다면 그 두려움에게 당당하게 져도 괜찮아요. 우선은 몇 번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보세요. 만약 감당할 수 있고, 익숙해지면서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면 그러한 것은 할 수 있는 시도를 계속해도 좋아요. 하지만 여러 번 시도를 하는데도 좋아지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시도들로 인해 스스로가 망가지는 것이 느껴진다면, 즉,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라고 여겨진다면 이 때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그 상황으로부터 당당하게 도망쳐도 괜찮아요. 이겨내려고, 극복해 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단은 도망치고 마음 편해지세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겨내려고 버텨내려고 애쓰다가 정신을 쇄약 하게 만들지 말고, 억지로 견디다가 몸을 망가트리지 말고, 지금은 일단 도망치세요. 그 두려움이 당신을 이기도록 놔두세요. 두려움과 싸우지 마세요. 절대로 당신이 약해서 두려움에게 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이 우리가 두려움과 관련된 증상을 대할 때 필요한 첫 번째 자세이자 첫 번째 스텝이에요.
Step 1. 두려움과 관련된 증상에게 져도 괜찮아요. 그 증상을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도망쳐도 괜찮아요. 극복하는 것을 포기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패배자가 아니에요.
어쩌면 누군가는 이건 그냥 결국 두려움에게 당신이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만들어낸 변명에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맞아요. 그 말도 맞아요. 하지만 저는 제 경험과 앞선 글에서 말했던 가설 1과 가설 2 그리고 오늘 말한 가설 3에 근거해서 이러한 변명도 괜찮다는 결론을 내린 것뿐이에요. 즉, 스텝 1은 어쩌면 극복하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에 생겨난 변명일지 몰라도, 설령 그렇더라도 가설들에 의하면 변명에 의해 생겨난 길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생겨난 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 가설 3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어요. 두려움과 관련된 증상이 진정한 내가 표출하는 행위라고 해서 그 증상,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감정 자체가 진짜 나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 증상,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감정을 어쩔 수 없이 떠올려버리는, 그런 시스템이 나라는 것이지 표출된 결과물 자체가 나라는 것은 아니에요. 떠올리기 싫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그 무서운 생각 자체가 나는 아니에요. 다만 그 무서운 생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붙들고 매달리면서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현재 나의 시스템이 나인 것이죠. 어떤 부정적인 생각은 완전히 엉뚱하고 전혀 내가 원해서 나온 생각이 아닐 수도 있어요. 지금 상황에 전혀 맞지 않은 생각일 수 있는 거죠. 감정 또한 완전히 생뚱맞은 감정일 수 있어요.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과 감정 자체를 나라고 인정하기보다는 이 생각과 감정을 이러한 상황에서 떠올려버리는 나란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증상 자체가 나는 아니라는 것, 이 증상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붙잡고 매달리며 이것을 표출하고 유지할 수밖에 없는 지금 나의 시스템이 그저 현재의 나인 것뿐이라는 점,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예요. 그러니 이것을 꼭 기억해 주세요.
첫 번째 스텝만으로는 사실 아무 것도 변하는 건 없어요. 왜냐하면 여전히 두려움에게 지는 건 괴로우니까요. 하지만 이 첫 번째 스텝은 우리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기 위한 베이스로서의 마음가짐 역할을 해줘요. 그러므로 꼭 필요한 스텝이라고 할 수 있죠.
다음 글에서는 첫 번째 스텝 다음으로 우리가 내디뎌야 할 두 번째 스텝에 대해 알아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