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글은 그저 한 사람의 의견으로 보시고 읽어주셨으면 해요. 저는 사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에 실패한 사람이에요. 세상에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책과 영상들이 많이 있어요. 하지만 실패한 사람이 쓴 글은 별로 없지요.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실패한 사람의 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저는 20년 전부터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왔었어요. 그리고 실패했죠. 하지만 실패 속에서도 나아갈 길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어요. 실패 속에서 제가 알게 된 점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글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그러니 이런 글이라는 것을 알고 읽어주셨으면 해요.
스텝 1에서 우리는 일단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어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은 극복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예요. 이처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나아가야 해요. 즉,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게 잘 질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죠. 지긴 지는 건데 잘 져야 해요. 잘 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두려움이 만드는 증상과 더 잘 공존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돼요. 아마 증상을 극복하려고 했을 때는 머리를 싸매고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을 거예요. 이기는 건 지금의 증상을 전복시켜서 넘어서야 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 수밖에 없어요. 아마 이 때문에 여러분은 뭘 하든지 머릿속이 온통 이 증상과 관련된 생각만 하게 되었을 거예요.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극복할 수 있나?', '저걸 하면 이 증상이 없어질까?' 이런 생각들로 하루를 가득 채웠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는 건 달라요. 그대로 놔두어도 자연스럽게 지게 되어있기 때문에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죠. 그저 지긴 지는데 덜 아프게 지는 방법을 찾는 것뿐이에요. 이처럼 우리는 생각의 흐름을 두려움과 관련된 증상을 극복하는 것에서 공존하는 것으로 옮겨가려고 해요.
저는 오랫동안 심리적 증상이 만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했어요. 왜냐하면 절망적인 상황이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에요. 저는 제가 가진 문제들을 극복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너무나 간절하게요. 심리적 증상과 관련된 저의 상태를 숫자를 사용해 좀 더 알기 쉽게 표현해 볼게요. 만약 증상이 전혀 없는 정상 상태를 숫자 ‘0’이라고 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0’인 상태에서 잘 생활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증상으로 인해 정상이 아닌 상태였고 제가 생각했을 때 숫자로 ‘-150’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 같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어떤 방법을 찾아서 지금의 비정상 상태인 ‘-150’을 조금씩 좋아지게 해서 ‘-80’ 더 나아가 ‘-10’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정상 상태인 ‘0’이 되게 만들고 싶었어요. ‘0’이 되기 위해 저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으며 노력했죠. 이런 시도 속에서 어떤 때는 ‘-150’이 ‘-100’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곧 다시 ‘-150’으로 돌아갔으며 심지어 더 나빠져서 ‘-200’으로 떨어진 경우도 있었어요. 그렇게 저는 저의 비정상 상태 ‘-150’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상상태 ‘0’으로 만들고자 했죠.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했어요. 왜냐하면 증상이 너무 힘들었고 이 증상들은 제가 정상적으로 사는 것을 방해했으니까요. 계속해서 실패해도 이런 제 생각은 변함이 없었어요. 아.. 그런데 정말로 이 생각이 맞았던 걸까요? 앞서 보았던 가설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었어요. 설령 증상이 저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제대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증상이 생명을 지키려는 또 다른 진정한 내가 두려움을 통해 표출해 내는 행위라면 지금까지 제가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왔던 저의 상태가 실은 비정상이 아니라 지금의 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정상적인 상태인 것은 아닐까 하고요.
다시 말해 제가 ‘-150’이라고 생각했던 저의 상태, 제가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던 ‘-150’이 사실 저란 존재에게 있어서는 비정상이 아닌 정상상태 ‘0’ 일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증상이 없는 상태가 분명 정상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증상이 있는 지금의 상태가 적어도 저에게는 정상상태일 수 있는 거예요. 저는 분명 어렸을 때는 이러한 심리적 증상이 없었으므로 이 증상이 생기기 전의 상태가 정상이라고 여기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증상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에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지금의 저에게는 이 증상이 새겨져 있어요. 증상이 나타나는, 제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제 상태를 지금 나란 존재에게 가장 정상적인 상태로 받아들여보는 거예요. 이처럼 정상 상태라는 것에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람마다 상대적인 정상 상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증상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에요. 증상에게 진 것이 아니에요. 두려움과 관련된 것은 이런 이기고 지는 개념이 없으니까요.
이런 말을 하는 건 정말 조심스럽지만 만약 여러분이 지금 학교나 회사를 다니면서 두려움이 만드는 증상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너무 힘들다면 저는 일단 학교나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어요. 알아요. 사람마다 상황은 다르고 꼭 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겠죠. 그런 분들은 어쩔 수 없이 다니되 두려움을 만드는 상황은 가급적 최대한 피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도망쳐도 된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운다면 건강을 많이 해치게 될 거예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일단은 지키셨으면 좋겠어요.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에요. 정답은 없어요.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도망쳐도 지는 게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 주세요. 일단은 도망치고 나중은 나중에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생활이 하고 싶겠지만 지금만큼은 도망치는 상황이 자신에게만큼은 정상적인 생활이 될 수도 있어요. 이렇게 최대한 자신의 외부환경을 두려움에게 맞춰주세요. 하지만 이렇게 도망치더라도 아마 여전히 두려움은 여러분과 함께 있을 거예요. 자신의 내면에 항상 있겠죠. 외부환경을 두려움에게 맞추어줬다면 이제 자신의 내부환경을 두려움에게 맞춰줄 차례예요.
지난번 글에서 보았던 스텝 1은 두려움에게 져도 괜찮다는 기본 마음자세를 우리에게 알려주었어요. 이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스스로가 증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선언을 할 거예요. 그것이 스텝 2이고, 스텝 2는 다음과 같아요.
step 2. 두려움과 관련된 증상이 나타났을 때 자신에게 다음처럼 말해줘요. ‘앗! 증상이 나왔네. 그래, 나답다. 이 증상이 나와야 바로 나지.’
우리가 지금 자신의 상태를 정상 상태로 받아들인다면 증상이 나타났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돼요. ‘앗, 증상이 나타났구나. 그래야 나답지. 아. 힘들다. 괴로워. 그래, 그래도 이러지 않으면 내가 아니지. 잘하고 있어. 이렇게 괴로워하는 내가 비참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나라면 이 증상이 나오는 것이 당연해’ 이것은 ‘이렇게 되다니 역시 나답다. 내가 겨우 그렇지. 뭐.’라고 자신을 비하하며 냉소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증상이 나타난 나를 나답다고 전적으로 인정해 주고 이러한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들여주는 거예요.
이처럼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그래, 이게 나타나야 나답지.'라고 말해주면 조금씩 이 증상이 머리를 싸잡고 고민하며 고쳐내고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이지 않게 돼요. 이것 또한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여전히 증상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더라도 이전보다 증상에 대해 조금씩 덜 생각하게 되고 덜 고민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로부터 아주 작고 조금이지만 머릿속에 여유가 생겨날 수 있게 돼요.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런 여유가요.
한편 여기서 나답다는 말은 언어이지만 증상을 극복하려는 언어가 아닌 증상을 받아들이고 이 증상과 공존하겠다는 선언이므로 앞서 보았던 '언어로는 증상을 극복할 수 없다.'는 가설 1에 위배되지 않아요. 우리는 지금 언어로 된 생각으로 두려움과 관련된 증상을 컨트롤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증상을 받아들이겠다는 열린 마음을 갖추는 거지요. 그리고 이건 겉보기 포기가 아니에요. 제가 겉보기 포기를 했다면 나답다는 말 대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거예요. ‘아이코, 또 증상이 나왔네. 포기하자. 어쩔 수 없잖아. 조금만 참자. 결국 지나갈 거니까.’ 이건 소극적 포기이자 싸움에서 진 뉘앙스가 느껴지는 포기이지요. 하지만 나답다는 말은 적극적 포기이자 싸움이 아닌 공존을 선언하는 뉘앙스를 나타내고 있어요. 완전히 다른 말이지요.
그런데 스텝 2에는 몇 가지 주의할 점들이 있어요. 이렇게 내가 적극적으로 증상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증상이 있는 지금의 이 상태를 내가 원했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된 것뿐이에요. 이렇게 되어 버린 자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지요. 또한 앞선 글에서도 말했지만 증상 자체가 나답다는 말은 아니라는 점이에요. 이 증상은 내 의도와는 다른 전혀 엉뚱한 것일 수 있어요. 그러므로 증상 자체가 나답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증상을 표출해 내고야 마는 나의 시스템이 나답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임을 주의해서 기억해 주세요. 또한 누누이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것들까지 포함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 주변에는 여러 시도와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장애물도 분명히 있어요. 이러한 것은 극복함으로써 자신을 개선시키는 것이 분명 맞아요. 단지 두려움과 관련된 것에 한해서만 이런 말을 하는 것뿐이에요. 두려움 중에서도 노력할수록 익숙해져서 감당할 수 있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어요.
이번 글은 두려움과 더 잘 공존하기 위해 두려움에게 져도 되는 환경을 만드는 내용이었어요. 자신의 외부환경과 내적 환경을 두려움에게 맞춰주는 것이었지요. 중요한 건 두려움과 싸우지 않는 거예요. 싸우지 않아야 이로부터 작은 여유가 생겨날 수 있어요. 이 작은 여유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다음 글에서 더 알아보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