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오늘도 고무장갑을 낀다.
물기 있는 고무장갑을 끼고 싱크대 앞에 섰다.
기름 번들거리는 팬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내가 이렇게 놔뒀으면… 뉴스에 나왔겠지.
“한 남성, 설거지 미뤘다는 이유로 말도 없이 냉전 돌입” 같은 제목으로.’
근데 이게 아내 실수였다면?
“바빴나 보네~” 한마디에 훈훈하게 끝났을 거다.
나는 왜 그랬냐고 3차 면접 보듯 질문받지만,
아내는 인간적인 실수쯤으로 넘어간다.
이게 바로 부부생활의 이중 기준.
말하자면,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 아주 정교한 차별 시스템.
조금 억울한데, 또 생각해 보면 이해도 간다.
솔직히 말해, 기름 묻은 팬보다
오늘 하루 축 처져 있던 아내 어깨가 더 신경 쓰인다.
그래서 오늘도 고무장갑을 낀다.
사실 싱크대는 그렇게 급박한 현장은 아니다.
그냥 뭔가 닦고 있으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마치 집안 평화를 위한 작은 의식 같달까.
‘나도 이 집에서 역할이 있다’는 착각,
그리고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원하는
작고도 진지한 생존의 몸짓.
생각해 보면, 이 집의 진짜 운영자는 아내다.
나는 가끔 도와주는 서브 요원이고,
아내는 매일 미션 수행 중인 본부장이다.
그게 미안하고, 또 은근히 존경스럽다.
그래서 오늘도 고무장갑을 끼며 조용히 다짐한다.
“내일도 평화협정 유지하려면…
기름끼는 내가 닦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