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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카혼타스 Oct 22. 2023

'운명적 이과' 여자의 글쓰기 수업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유시민

드라마를 보다 보면 내용상 중요한 장면도 아닌데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우가 가끔 있다. <태양의 후예>는 특히 기억에 남는 대사와 장면이 많다. 주인공 단역 할 것 없이 모든 캐릭터가 자신의 신념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명장면 명대사로 넘쳐나는 이 드라마에서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는 한 장면이 있다.     


“강 선생은 왜 의사가 됐어요?”

매력적인 유시진 대위에게 흔들리면서도 군인이라는 직업 때문에 다가가기를 망설이는 의사 강모연에게 유시진이 묻는 장면이다. 강모연의 대답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국영수를 잘해서요. 특히 수학.”


나도 수학을 특히 잘했다. 강모연 마냥 국어, 영어까지 잘했으면 의대에 갔을 텐데 나는 수학, 과학에만 특출 난 학생이었다. 학교 대표로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고 내신등급이나 수능 모의고사 성적도 두 과목만 두드러지는 나에게 이과냐 문과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학 잘하면 이과, 영어 잘하면 문과’가 정해진 답이었으니까.

대학까지 마치고 사회생활을 한 지도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한 번씩 후회가 된다. 고등학교 때 과감하게 문과를 택했으면 어땠을까? 이과였어도 대학 전공은 문과로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대학 가서 들은 화학 전공수업은 중·고등학교 6년 동안 했던 공부는 그저 시험공부일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너무 재미있었다. 대학 내내 신나서 공부했고 그 당시에는 아쉬움도 후회도 전혀 없었다. 만약 전공을 살려 반도체회사나 제약회사 같은 직업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이런 후회는 없었을까. 

수학을 잘하는 만큼 책도 많이 읽는 아이였다. 수학 경시대회도 나갔지만 백일장 대회도 많이 나갔다. 지금은 대부분 공모전처럼 글을 써서 온라인 접수하는 방식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회 장소에서 원고지에 바로 써서 제출하는 학생 백일장이 많았다. 글쓰기 주제도 미리 공개하지 않고 현장에서 주어지면 시간 내에 써서 내야 했다. 중학생 때는 소설이나 수필 같은 산문을 썼고 고등학생 때는 시를 썼다. 교내 전통 있는 시 동아리 회원이었으니까.

끙끙대며 붙잡고 있던 어려운 수학 문제가 탁하고 풀렸을 때의 쾌감만큼이나 썼다 지웠다 반복하며 끄적이던 것들이 한 편의 시 같은 모양새를 갖췄을 때의 기쁨도 못지않게 컸다. 동아리 선배들을 따라 다양한 시를 많이 읽고 습작도 부지런히 했다. 매년 동아리 주관으로 학교 축제에서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앙드레지드와 헤르만헤세를 읽고 시를 쓰는 문학소녀의 본업은 수학 문제와 씨름하는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수학을 잘해서 이과를 가고, 이과를 갔으니 수학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결국은 수능시험 수학 가점으로 이과대에 합격하는 자연스러운 수순을 밟는 평범한 대한민국 고등학생.

졸업 후 첫 직장은 전공 관련 회사였지만 지금은 18년째 전공과 무관한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다. 가끔 전공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보다 좀 더 자주 애초에 문학 관련 전공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든다. 몇 해 전 시립도서관에서 1년 동안 일할 기회가 있었을 때는 지금이라도 사서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일하면서 사서 자격 과정을 이수할 방법이 없어 포기했지만 퇴직 후에라도 꼭 이수해서 도서관에서 봉사라도 해야지 결심했다.    

올해 도서관 프로그램 <1인 1책 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부터는 문예창작을 전공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아니면 선생님처럼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던가. 책의 주제에 맞는 글감을 정해 격주로 한편씩 써내는 것도, 한 편당 A4 두 장 분량을 채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찌어찌 쓴 글의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맞춤법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1인 1책 쓰기 프로젝트>는 배지영 작가의 지도 아래 17명의 수강생이 본인이 정한 주제로 한 권의 책을 펴내는 장기 프로젝트다. 책을 쓴다고 하면 뭔가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은 무언가를 쓰고 싶은 17명이 모여서 쓰고 또 쓰는 글쓰기 수업이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해 한 번의 수업만을 남겨놓고 있는 지금 마지막 숙제를 쓰고 있는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왔다는 대견함 한편으로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크다.  

살아오는 내내 책에 대한 갈망은 있었다. 쓰고 싶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면서 내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쓰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라는 것도. 함께 글을 쓰는 16명의 참여자들은 다양한 연령대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다. 각자의 생각도 살아가는 모습도 모두 다르지만 책을 좋아하고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분이 우리를 ‘글벗’이라고 칭했는데 그 말이 참 좋았다.

배지영 작가는 몇 해 전 저자 강연에서 처음 만나고 글쓰기 선생님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격주 목요일 저녁마다 수업을 위해 2시간 거리를 달려오셨다. 잘못 쓴 부분은 세심하게 고쳐주고 잘 쓴 부분은 크게 칭찬해 주셨다. 잘하든 못하든 쓰고 또 쓰라고 격려해 준 선생님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가 끝까지 쓸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선물한 책’이라는 주제로 쓰고 있다. 수업 초반에 주제가 명확해서 좋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글이 자꾸 주제를 벗어나서 한참을 고생했다. 평소 내 생각이나 의견, 그때그때의 감정이나 기억 속의 사건들을 글로 적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고 재밌기까지 했지만 책의 주제에 맞게 여러 편의 글을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동안 선물했던 책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원래 책 읽기를 좋아했던 터라 쓰는 책과 상관없이 당장 읽고 싶은 책이 쌓여가는 것도 문제였다. 글쓰기 수업에서 선생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에게는 17명 모두의 문제는 문제대로 각각의 문제는 또 그 문제대로 척척 해결해 주는 선생님이 있다. 

글쓰기 수업이지만 잘 쓰려면 읽는 것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매주 금요일마다 읽고 있는 책을 공유하고 있다. 처음에는 무슨 책을 읽을까만 고민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다른 사람들이 읽고 있는 책에 관심이 생겼다. 나랑 취향이 비슷하다 싶은 분도 있고 매번 낯선 작가의 책을 올리는 분도 있다. 어느 날은 평소의 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소설책을 따라 읽기도 하고 시리즈 만화책을 읽고 있는 분을 따라 전권 읽기에 도전하기도 했다. 얼마 전 금요일 한 선생님이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올렸다. 평소 좋아하던 유시민 작가의 신작이었다. 발간된 지 두 달이나 지났는데 모르고 있었다니. 책 쓰기에 몰두하느라 신작까지는 챙기지 못하던 터였다. 냉큼 따라 읽었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제목부터가 재밌었는데 ‘이과 여자인 나는 지금 글쓰기 공부를 하고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수학이 어려워서 문과를 선택했다고 했다. 선택했다고 하지만 진짜 선택한 건 아니고 본인은 수학을 못 해서 문과가 된 ‘운명적 문과’이며 선택은 수학을 잘해야 할 수 있다고 썼다. 내 경우를 본다면 그는 틀렸다. 수학을 잘한다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학을 잘하면 그냥 ‘운명적 이과’가 되는 것뿐이다.

‘운명적 문과’인 작가가 문과 독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작가는 과학자들이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과학적 언어를 쓴다고 말한다)로 썼다는 이 책은 여타의 과학 교양서보다 더 흥미롭지도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더 쉽게 술술 읽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본인의 책을 ‘과학을 소재로 한 인문학 잡담’이라고 소개하는 것처럼 뼛속까지 문과인 작가가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을 따라 읽는 재미가 있다. 과학적 사실은 그대로 받아들이되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과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과학을 공부해도 여전히 문과 남자 그 자체였다. 

마지막 수업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선생님께 선물할 책을 정하지 못해 고민 중이던 차에 이 책이다 싶었다. 책 선물은 해야지 마음먹는 것은 쉬워도 무슨 책을 선물할지 고르는 것은 매번 어렵다. 평소에 책을 엄청 많이 사서 읽는 분이라 선생님에게 없는 책을 고르고 싶기도 했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 중에서 골라 내 책 취향을 전하고 싶기도 했다. 유시민 작가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가여서 내가 아무리 재밌게 읽었더라도 그동안 여간해서는 책 선물로 선택하지 않았었다. 이번에는 과감히 선물해 볼까 한다. 어쩌면 선생님도 ‘운명적 문과’ 일지 모르니까. 평소에 다른 분야에 비해 과학에는 관심이 덜했기를, 이 책이 앞으로 계속해서 나올 작가님 신작 중의 한 권에 작은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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