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카혼타스 Oct 22. 2023

종이 도서대출카드 기억하시나요?

유병재 삼행시집 《말장난》 / 《이적의 단어들》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겡끼데스!”

일본어를 전혀 모르더라도, 영화를 안 봤더라도 자연스레 따라 외치게 되는 영화 속 명대사이다. 1999년 개봉 당시 한국말 더빙판에서도 이 대사만큼은 일본어로 내보내고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라는 한글 자막을 넣었다고 한다. 주인공이 하얀 눈밭을 걸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 <러브레터>는 일본 북해도 오타루의 설원을 배경으로 풋풋하고 안타까운 첫사랑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개봉 즈음에 보고 다시 제대로 본 적은 없는 영화인데도 몇몇 장면과 대사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얼마 전 평소 아끼던 동생의 새로 이사한 집에 초대받아 갔다. 호랑이 나오는 그림책을 좋아한다는 그의 아홉 살 아들 현서를 위해 우리 아이들이 읽던 전래동화 전집을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벽을 따라 쭉 늘어선 책장이 먼저 보였다. 집을 간단히 둘러보고 책장 앞에 앉아 가져간 책을 정리하던 중 아이 책장 한편에 마련된 그녀의 소박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선물했던 책도 여러 권 꽂혀 있어 반가웠다. 

“언니! 이 책 한번 읽어볼래?”

건네받은 책은 유병재 삼행시집 《말장난》이었다. 쭉 훑어보다 아무 쪽이나 몇 페이지 읽었을 뿐인데도 유병재의 톡톡 튀는 재치와 그 속에 숨은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분 좋게

 자 되는 방법   

    

 족 달지 말 것

 하다 생각 말 것     


 방 따라잡을 줄 알았는데 

 평이되 평등하지 않은 너와 나

 만치 멀리 가네     


책을 여기저기 넘겨보던 중 마지막 장에서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책 뒤표지 안쪽 포켓에 도서대출카드가 꽂혀 있었다. 스마트폰 앱에서 QR코드 인증으로 책 대출을 하는 시대에 종이 대출카드라니. 평소에도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웃겨서 개그맨 시험을 봤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자주 듣던 동생이었다. 흔하게 보내는 카톡 메시지 하나도 라임을 맞춰 짧은 시처럼 정성스럽게 쓰고, 초콜릿 과자 하나를 건넬 때도 손글씨로 쓴 재치 있는 메모를 붙여주는 몹시도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는 책이라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어서 옛날 기억을 떠올려 직접 대출카드를 만들었다고 했다. 종이카드를 빼서 보니 그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이름과 대출 날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도서대출카드를 보니 영화 <러브레터>가 떠올랐다. 새하얀 눈밭에서 히로코가 ‘오겡끼데쓰까’를 외치는 장면만큼이나 유명한 장면이 중학교 시절 남자 주인공 이츠키가 도서실 창가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자락 사이에서 책을 읽는 장면이다. 이츠키는 도서실에 있는 책을 대출해서 도서대출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으로 자신과 이름이 같은 여자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훗날 여자 이츠키가 학교 도서실을 방문했을 때 소장 도서의 마지막 장에 꽂혀 있는 대출카드에 ‘후지이 이츠키’라는 본인의 이름이 수없이 적혀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중 한 대출카드 뒷면에 자신의 중학교 시절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도. 이츠키가 대출카드에 적었던 수많은 ‘후지이 이츠키’는 본인 이름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첫사랑의 소중한 추억이 책마다 담겨 있다. 

그 시절에는 책마다 꽂혀 있는 대출카드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을 몇 명이나 읽었는지, 읽은 사람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없는지, 인기가 있는 책인지 아닌지 같은 많은 정보가 들어있었다. 내가 반납하고 나면 또 누군가가 이 책을 빌릴 테고 대출카드에 적힌 내 이름도 보겠지 하는 생각에 이름을 예쁘고 정성스럽게 썼던 기억도 있다.

《말장난》을 빌려와서 읽고 대출카드를 쓰는데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이런 재미있는 생각을 한 동생이 기특했다. 뭔가 나도 의미 있는 답을 하고 싶었다. 《말장난》을 반납하면서 《이적의 단어들》을 선물했다. 유병재의 《말장난》이 흔히들 말하는 B급 감성이라면 《이적의 단어들》은 그 고급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를 위해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성공

  싫은 사람과는 같이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상태


 자유

  한번 홀딱 젖고 나면

  더 젖을 수는 없다.

  그때부터 자유


 시간

  농구경기 중간엔 시계가 시시때때로 멈추지만, 축구경기 도중엔 시계가 멈추지 않는다. 시간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흥미롭다. 인플레이가 아니면 유의미한 시간으로 세지 않겠다는 농구의 논리와, 시간은    좌우지간 흐르는 것이고 인플레이가 아닌 순간은 추가 시간으로 보상하겠다는 축구의 논리. 물론 실세    계에서 시간은 멈추지 않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고 나중에 보충해주지도 않지만, 때론 생각한다.     우리 삶에도 농구 혹은 축구의 방식으로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택할지.     

이전 13화 나와 닮은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