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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참담한 영웅 설화 <아기장수 우투리>

작자 미상의 설화 <아기장수 우투리>를 읽고

by 김태경

부루스웨인은 어릴 적 부모님과 길을 가다 갑작스러운 총격으로 부모님을 잃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범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배트맨으로 변모한다.

크립톤 행성에서 태어나 지구로 보내진 클라크 켄트는 지구인 양부모에게 힘을 조절하는 능력을 배운다.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초능력을 들키지 않길 바랐던 양부로 인해 양부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켄트는 자신의 초능력을 온 인류를 위해 쓰기로 마음먹고 슈퍼맨이 된다.

부자이면서 과학천재였던 토니스타크는 돈을 벌기 위해 만든 기술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상 무기가 된다는 충격적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테러단체에 납치되어 심장에 치명적 상처를 입게 되면서 자신의 심장을 보호하려고 만든 슈트를 입고 세상을 지키기는 아이언맨으로 활약한다.


우리나라에도 영웅전(英雄傳)이 있다. 이순신, 강감찬 장군, 안중근과 윤봉길, 유관순 열사처럼 역사 속에서 나라와 백성을 지킨 영웅적 선조들은 익히 배우고 되새시고 있으나 할리우드 스타일의 신화적 영웅이야기는 많이 접하지 못한 것 같다.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의 이야기가 있으나 출생에만 그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의적 홍길동이 가장 스타급 '영웅'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아이들과 고전 읽기 책을 보다가 <아기장수 우투리>라는 설화를 읽게 되었다.


모든 백성들이 가난하고 힘겹게 살던 시절, 지리산에 살던 가난한 부부가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탯줄이 잘리지 않았고 억새풀을 끊어 와 잘랐더니 그제야 탯줄이 잘라져 태어난 아이였다.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우투리라고 지었고, 우투리는 갓난아기 때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방에 뉘어 놓고 나가서 일을 보고 들어오면 서랍이나 장롱 위에 올라가 있기도 하고 방을 훨훨 날아다니기도 한 것이다. 자세히 보니 아기의 겨드랑이에 조그만 날개가 붙어 있었고, 부부는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라 영웅을 낳은 것임을 알게 된다.

켄트의 부모처럼 우투리를 보호하기 위해 부모는 우투리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 버리지만 지리산에 영웅이 났다는 소문을 임금이 들었다. 우투리를 잡으러 몰려온 군사들을 피해 도망간 우투리는 부모와 다시 재회했고, 우투리는 콩 한 말을 어머니에게 내밀며 솥에 콩을 볶아 달라고 부탁한다. 볶은 콩으로 갑옷을 지어 몸을 가리고 겨드랑이 날개도 가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팠던 어머니는 콩을 볶다가 톡 튀어나온 콩 한 알을 주워 먹고 만다. 우투리가 만든 갑옷은 딱 한 개의 콩알이 모자라 겨드랑이 날갯죽지를 다 가리지 못했고, 다시 우투리를 잡으러 온 군사들이 쏜 마지막 화살에 콩 한 알이 모자라 가리지 못했던 날갯죽지를 맞고 만다. 부모는 쓰러진 우투리를 슬픔으로 묻어준다.

하지만 백성들은 우투리가 죽지 않고 다시 살아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이라 생각했고 이 말에 다시 화가 난 임금은 우투리의 부모를 잡아 우투리의 출생의 비밀과 묻힌 곳을 말하라며 집요하게 괴롭힌다. 겁이 난 우투리의 어머니가 그만 모든 사실과 우투리가 묻힌 곳을 말하고 만다.

하루만 더 있었으면 우투리는 백성들의 바람대로 다시 짠 하고 나타나 백성을 굶주림과 압제, 폭정에서 구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겁이 질려 그 하루를 참지 못하고 모든 비밀을 말해 버린 우투리의 엄마로 인해 우투리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누가 지었는지도 언제 지어졌는지도 모를 이 설화가 나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만화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히어로가 저마다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우투리의 슬픈 이야기는 어머니로 인해 야기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콩을 볶다가 콩 한 알을 먹어 갑옷 완성에 실패, 우투리가 화살을 맞게 된 틈을 발생시켰고 군인들의 고초(苦楚)를 견디지 못하고 자식의 비밀과 묻힌 곳을 말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쨌든 구전이기도 하고 시대마다 자기들 입맛에 맞게 우투리의 다양한 버전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냥 우투리 어머니의 행적에 아쉬워하고 말아야 할 것 같다.

우리 설화에도 고단하고 굶주린 삶 속에서 영웅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염원과 그 염원이 담긴 구전 설화가 있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처연(悽然)하게도 여겨졌다.


우투리를 포함해서 만화나 영화, 고전, 설화에 등장하는 전 세계 모든 영웅은 저마다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 슬픈 사연은 영웅으로의 삶을 선택하는 계기이자 그 영웅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기도 할 것이다.(그래서 영웅 곁에는 항상 악당이 존재하는가 보다.)

하지만 인생은 영웅과 비(非) 영웅을 가리지 않는지라 영웅의 모습이 아닌 평범을 사는 수많은 사람에게도 슬픈 일들이 찾아온다. 갑자기 자식이 아프기도 하고, 사고로 가족과 친구를 잃기도 하며, 영웅도 아닌데 찾아온 빌런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지기도 한다. 인류를 구하는 무게를 지닌 초능력자에게만 아프고 슬픔의 무게가 지어지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엄마로, 아빠로, 자식으로, 아내로, 남편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이런 사람들이 영웅보다 훨씬 더 많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는 그 사람들은 내게 귀감이 되기도 하고 감동을 주기도 하며 때론 용기와 위로를 주기도 한다.

우투리처럼 몸 어딘가에 날개가 있어 날아다닐 수는 없고, 슈퍼맨이나 아이언맨처럼 공간이동이나 레이저 발사를 할 순 없지만 누군가 다른 이에게 감명을 주고 그래서 다시 한번 희망을 품어 보게 하는 존재라면 사실상 영웅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타인의 슬픔을 이용해서 자신의 세를 불리려는 빌런으로 하루를 살지 말아야겠다.

시간은 원래 삶의 경험을 거치며 모두에게 지혜를 줄 목적으로 설계되었으므로 주어진 시간과 역할에 충성하며 내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에게 성실하고 착실한, 성숙한 영웅으로 기억되는 인생을 살자 다짐해 본다.

오늘, 당신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따뜻한 위로를 전했다면 그대는 오늘 하루를 영웅으로 산 것이리라.


그래도.. 아기장수 우투리.. 이렇게 슬프고 참담한 영웅설화는 처음 읽어보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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