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수필 <권태>를 읽고
나는 배우 강동원이 좋다.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운 피사체, 잘 생기고 훤칠한 외모를 보면 절로 미소 지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 그는 나를 모르고 나도 그의 삶을 모른다. 불행하게도 우린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으며 그 어떤 사연으로도, 단 1%의 이야기나 감정으로도 엮여 있지 않다.
내가 15년 넘게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은 강동원과 다르다. 나이도, 얼굴도, 색깔도.. 많은 것이 다르지만 그와 나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지언정 서로를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이야기와 민감한 감정들, 다 지나버린 과거들과 각종 추억(각자 선택적이긴 하지만)들로 엮여 있다.
배우 강동원이 내게 하룻밤 꿈같은 예쁜 그림이라면, 남편은 내 양말, 수저와 젓가락, 신발, 가방, 칫솔, 수건, 노트북, 휴대폰 같은 존재다. 강동원에게는 그 어떤 불만도 원망도 지루함이 있을 게 없으며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도 없지만 남편은 이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로부터 각종 잔소리와 때론 원망, 불평을 듣게 될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강동원 사이에는 앞으로도 그 어떤 변화도 없겠지만, 나와 남편은 남은 세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함께 겪으며 깊어지고 성숙해지고 넓어져 가게 될 것이다.
소설가 이상의 수필 <권태>를 읽었다.
수필 속 '나'는 벽촌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빨리 밤이라도 올 것이지 하릴없이 무료하고 지루한 하루가 어찌나 긴지 '나'는 산과 들이 초록색인 것에 시비를 걸고, 아는 사람이라며 제 할 일 잊은 채 짖지 않는 동네 개에게 쓸데없이 논리적인 지적질을 해댄다. 늘어지게 낮잠 자고 있던 최서방의 조카를 깨워 이길 것이 뻔한 장기를 부득이 두며 시간이 가길 기다리다, 마침내 맞이한 밤이 되었을 때 소화시킬 요량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나는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라며 자살의 이유조차 찾을 길 없는 권태의 극단 상황에 있노라 실토한다.
"..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 - 자살의 단서조차를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그것이다..(중략)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권태로 그 무엇 하나 곧이곧대로 안 보이고 모든 것이 거지 같고 증오스럽다. 이런 내가 숨 쉬고 살아있는 것이 번잡스럽고 귀찮기 짝이 없어, 머릿속으로 온통 두들겨 패고 찢고 침 뱉고 흘겨대고 있는 중이다.
'나'뿐만 아니라 나도 그럴 때가 있다.
회사에서는, 더 이상 나은 선택을 하지 않는 상사들의 사실상 불의를 보며 '지겹다 지겨워' 한숨을 내 쉰 적이 있고,
뉴스를 보면서는 터진 입이라고 하고 싶은 말 다 내제 끼며 국민의 심판 운운하는 정치인들이 개탄스러워 뉴스와 담쌓아 버린 적도 있고,
길을 가다가 대뜸 큰소리치며 욕하는, 얼굴에 나는야 불친절함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의 면상을 보자면 사람들과의 접촉, 교제, 사귐에 환멸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부지기수이다.
<권태>를 읽다 보면, 사실 주인공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 것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간 최서방 조카의 장기 스타일을 눈여겨봤던 사람이며, 아침저녁 그리고 어제와 오늘이 미묘하게 다른 바람 산 나무 꽃들을 보고 느낄 줄 시선을 가지고 있으며, 동네 개들과 심지어 꼬끼오 울어대는 닭 목소리에 대한 관찰력 역시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필은 마치 소설가 이상의 삶처럼 치열하고 복잡한 번뇌를 보여준다.
작은 것 어느 하나든 세심하게 대하고 그 생각의 끝까지 가 보려는 그의 고단함이 그를 권태롭게 만들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사실 세상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지닌 자였으리라..
권태도 번뇌도 증오도 뭔가 뜨겁게 관심을 주고 갈망했던 것에 대한 상대적 반응이지 않을까
아마 이상이 시골 벽촌이 아닌 도시 속에 있었더라도 그는 사람들, 시장, 전차를 보며 역시 <권태>라는 제목으로 같은 내용의 수필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누구나 일상 속에서 권태로움을 느낀다.
부모에게, 남편에게 느끼며 때론 자식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된다.
일을 하면서도 그렇고 맨날 부딪히는 사람들이 어느 날 지겹고 꼴 보기 싫어질 때가 있지 않나.
열심히 살고 있고, 살아왔고, 뜨겁게 욕심내며 사랑했던 흔적있었던 것은 아닐까.
고작 40대 중반이기는 하나, 시간이 주는 경험들이 교훈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애태우며 절절한 사랑을 하는 경험이 귀하지만, 그 사랑이 식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너머의 단계로 진화하는 순간이 오는데 그건 생각보다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를 촛불처럼 태우며 일중독자라 일컬음 받는 노동자로 사는 순간을 한 번쯤 겪고 나면 어느 순간 멈춤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감정이 폭풍처럼 몰려오는데 정말로 잠시 쉰다고 해서 내 인생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기도 하고,
예측하지 못했던 질병이라도 찾아올라치면 권태든, 싫증이든 그간 내가 살며 느꼈던 감정들은 부서지고 초라하고 유약한 인간존재를 깨닫고 한없이 겸손한 자로 탈바꿈되지 않던가..
그러니 권태가 찾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뜨겁고 열정적이고 수고로웠던 시간들을 지났다는 흔적일 것이다.
이상의 젊은 적 수필만 남아 있어 아쉽지만, 그가 좀 더 나이 들어 일제강점기와 가난한 시절을 지나 이후의 시대까지 살았다면 그의 수필 속 '나'의 모습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해진다.
<권태>의 벽촌에 있는 '나'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당신은 정말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군요.
이 세상 만물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세심한 관찰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시와 소설이 그토록 자유롭고 혁신적이고 재미있나 봅니다."
나는 이상 작가 생존 세월의 거진 2배의 시간을 살고 있는 중이다.
내 인생이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만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고 사유하며 시간과 경험이 주는 교훈을 잘 주어 담아 살아가는 인생이길 바란다. 물론 따뜻하고 올바른 사랑을 전제로 말이다.
문득 찾아오는 권태로움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도 하며 어제를 반추하고 반성하며 살아야겠다.
그리하며 내게 삶이 더 허락되어 70, 80살이 되었을 때 내 글에는 어떤 것이 담길지 한번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