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률의 단편소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읽고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와 교환일기를 썼다.
공책 한 권을 서로 주고받으며 하루는 내가, 하루는 친구가 일기를 쓰는 형식이다.
친구에게 쓰는 우정편지가 되기도 하고, 어느 날 있었던 속상한 일을 토로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스티커도 붙이고 그림도 그리고 형형색색의 펜들로 예쁘고 귀엽게 꾸미곤 했다.
그 속엔 철없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하고 감정적이기도 하며 때론 의욕적인 고등학생 소녀가 살고 있다. 내 또래 여학생들은 아마도 제법 썼을 만한 그 많은 교환일기들을 모아 분석한다면 아마도 청소년 심리와 가족학의 진정한 학술적 근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대학 때는 아는 오빠(?)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어린 시절부터 오래 봐 왔던 오빠에게 이 얘기 저 얘기 주저리 썼었다. 물론 오빠도 자신의 일상을 담은 편지를 자주 답장으로 주곤 했다. 내 옛날 일기 공책들이 담겨 있는 상자에 편지 몇 장에 섞여 있는 듯 하지만 내용이 어떤 거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집에서 있었던 속상한 일, 사람들에 대한 생각, 신앙에 대한 이야기 등이었던 것 같다.
12월이면 내년에 새로 쓸 다이어를 고르러 다니는 일은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매일 느꼈던 감정, 만났던 사람들, 있었던 일들을 적어두곤 했다. 왜 적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게 있었던 일들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그 일기들을 보려면 약간 실눈을 뜬 채로 민망함과 헛웃음, 창피함을 견뎌야 하지만 말이다.
지금은 핸드폰으로 일기를 쓰고, 이메일로 편지를 대신하지만 고작 삐삐가 유일한 무선 통신 수단이었던 그때, 펜을 들고 쓰는 편지와 일기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일기와 편지 속에 청춘과 사랑과 고뇌와 우정이 담겨있던 시절이었다.
박상율 님의 단편 소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에도 첫눈에 사랑에 빠진 한 고등학생이 며칠 만에 완성한 공책 한 권 분량의 시집이 등장한다. 연애감정이야말로 이 지상에 있던 가장 소중한 감정이라 여기며 썼던 그 고등학생 시인의 뜨거운 시집은 마음 고백의 수단이 되어준다.
하지만 연애감정 보다 연애가 주는 상처의 고통도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그 고등학생시인은 다시는 펜을 잡지 않게 되고 만다.
"내 딴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시를 써서 주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현아에 대한 원망이 치솟을 대로 치솟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일을 계기로 다시는 잠언 시고 연애시고 내 안에서는 시 비슷한 것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걸 잊기로 했다. 시 나부랭이 같은 건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 시도 밉고 여자도 밉고, 나아가 세상이 다 미웠다"
2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글쓰기를 잊은 채 돈 세는 기계로 전락하는 자신을 마주하고 그는 다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휴가가 끝난 뒤에도 나는 직장에 다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글에만 매달렸다. 처음에는 넋두리도 있고 푸념도 있었지만 차츰 내 글의 방향과 형식이 잡혀갔다. 인생이니 우주니 하는 거창한 것도 아니었고 뜻도 모를 추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이 살아온 얘기이자 내 이웃들의 얘기였다. 결국 글을 쓰다 보니 세상을 건지느니 인생을 풍요롭게 하느니 하는 것보다는 뭐니 뭐니 해도 나 스스로를 위해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얘기를 쓰는 것 같은데도 끝내 그 글을 통해 위로를 받는 이는 나 자신이었으니까."
고등학생 시인의 지상 최대 연애 감정이 담긴 세상에 한 권뿐인 그 시집은 40줄이 되어 다시 그의 손에 돌아왔다. 응답받지 못했던 첫사랑의 진실과 함께 말이다.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나는 내 어린 시절 소통의 매개체이자 생각과 감정의 표현창구이기도 했던 내 일기와 편지들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글쓰기가 목적이었다기보다 나를 발산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글쓰기가 내게 즐거운 일이었다는 걸 깨달으며, 40줄이 넘은 이 나이에도 여전히 매일 일기를 쓰며 내 삶을 기록하고 있는 나를 쭈욱 연결 지어 본다.
이제는 나 혼자만의 일기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 시를 감상하며 내 생각을 글로 나열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30초 혹은 1분.. 내 글을 읽는 분들의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라이킷 하나에 감사의 미소 지어 보기도 하고, 좀 더 성숙하고 진솔한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또 정리하면서 말이다.
내 이야기를 담은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이 아직 없다면, 지금이라도 시작해 보면 어떨까?
'책'이라는 말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오늘 하루 느꼈던 감정 몇 줄 써 보고, 내 마음속에 지금 드는 생각 5가지를 써 보는 일부터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잠시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 생길 테고 그 시간들이 좋다는 것을 점점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넷플릭스 왜 봐? 글쓰기 하는 거 재미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