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이 글은 소설 <데미안>에 대한 오직 개인적인 감상에 충실할 것이므로 내용의 수준이 매우 낮을 수 있음을 미리 일러둔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었다.
그 옛날 매우 재미없게 느껴졌던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니 그때 왜 그렇게 재미없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지나치게 생각이 많고, 그 생각들이 대부분 철학적인 것, 종교 교리적인 것들이므로 그와 같은 관심사가 아닌 독자는 재미가 없는 것이 지당하다. 다만 고전이라고 하니 힘내서 읽어나가는 것이므로 '고전'으로 칭해진 문학과 예술들의 영향력은 가히 크다고 하겠다.
40대 중반이 되어 다시 읽은 <데미안>은 약간 남다르게 다가왔다.
'두 개의 세계'를 나름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는 기성세대로서의 안타까움과 간절함
주인공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서로 다른 두 세계, 즉 낮과 밤이 뒤섞여 있다고 말한다.
"낮의 세계는 부모님의 집이었다. 그곳은 나에게 무척 친숙한 세계였는데,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로 불리었다. 부드러운 빛과 명백함 그리고 청결함이 여기에 속했고 정다운 이야기와 깨끗이 씻은 손, 깨끗한 옷 그리고 훌륭한 예절이 깃들어 있었다. (중략) 또 미래로 이끌어주는 길과 방향이 있었고,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백, 용서와 올바른 결심, 사랑과 존경, 그리고 성서의 말씀과 지혜가 함께 했다. 밝고 순결하며 질서 정연한 삶을 살고 싶다면, 나는 이 세계에 머물러야 했다.."
"두 번째 세계에는 하녀와 직공들이 있었고, 유령 이야기와 떠도는 좋지 못한 소문들이 있었다. 도살장이나 교도소, 주정뱅이들과 욕지거리를 일삼는 아낙네들..(중략) 나의 눈과 귀가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른 세계가 존재했다. 비록 그 세계가 낯설고 섬뜩하게 느껴지며 양심의 가책과 불안감을 일으켰지만, 나 역시 다른 세계에 살았다. 때때로 나는 이 금지된 세계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싱클레어는 이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나 두 세계의 경계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마치 천국과 지옥을 단번에 결정짓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까지도 싱클레어가 말한 두 세계를 살며 때론 경험한다.
다만 시간이 선사하는 삶의 경험이 어느 세계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줄 뿐이다.
맥락과 대화 없는 지나친 엄격함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들에 대하여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카인(성경에서 기록한 최초의 살인자로 동생 아벨을 죽인 인물)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 대화 이후로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성경의 이야기들이 어쩌면 사실이 아닌 신화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청소년이 된 싱클레어는 청소년이라면 겪는 성적이고 감정적인 변화들을 죄악의 차원으로 여기기도 한다. 물론 프란츠로부터의 폭력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을 포함해 대부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갈등을 치열하게 겪고 있다.
종교적 교리에 충실하며 엄격했던 싱클레어의 부모님(나는 그렇게 이해됐다)은 낮의 세계에서 바르게 살았지만 정작 싱클레어는 극심한 폭력의 피해와 고통을 함께 해 주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다른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되었겠지만 너무 엄격한 기준과 통제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사춘기 시절을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말이다.
"우리 부모님도 이런 상황 때문에 적잖이 괴로우셨을 것이다. 낯선 영혼이 나를 사로잡았으며, 나는 한때 그렇게 친밀했던 우리 가족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중략) 특히 어머니는 나를 못된 자식이라기보다는 환자로 취급했다. (중략) 가족들은 나를 동정하며 모두 나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도가 모두 소용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데미안, 에바부인, 피스토리우스..
굴욕적이고 고통스러운 학교 폭력을 당했던 싱클레어, 윤리적 도덕적 교리적으로 치열한 내면의 갈등을 겪은 싱클레어, 삶과 구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심취했던 싱클레어는 아무도 모르는 친구들을 만들어 대화한다.
생각해 보면 나도 싱클레어처럼 저들과 같은 사람들을 친구로 두고 있다.
배가 안 고픈데 뭔가 먹고 싶을 때 혼자 심각하게 생각하며 중얼거리지 않나.
"안 먹는 게 좋지 않을까? 배도 안 고프고 시간도 늦었고.. 참는 게 낫지 않을까?" vs "이거 먹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한 입만 먹지 뭐.."
무엇을 선택하든 그 결과는 항상 나에 대판 셀프 평가를 수반한다.
"잘했어. 이제 살 빠질 너를 기대해. 후회하지 않을 거야. 너는 새롭게 태어나는 거야" vs "인생이 그렇지 뭐, 실패를 선택하는 건 언제나 너야. 근데 인생이 배부르고 즐거우면 되지 뭘 더 바라?"
먹을까 말까의 문제는 단순히 거기에서만 끝나지 않는 셈이다.
"마시고 죽을까? 오늘까지만 마시지 뭐" vs "계속 이렇게 살래? 속 아프다면서 또 마시냐? 정신 차려라"
"나도 쟤처럼 저런 멋진 것들 가지고 싶다. 이 넘의 지지리 궁상 인생. 지겹다" vs "쟤랑 너랑은 달라. 저건 그냥 보이는 것뿐이야. 사람은 속이 중요하지"
매 순간 인지하지 못할 뿐 나에게도 데미안, 에바부인, 피스토리우스와 같은 친구들이 제법 있다.
나는 오늘도 수많은 데미안을 만나 논쟁한다.
때론 데미안이 나를 각성시켜 주기도 하고, 양심을 발동시키게도 한다.
다만 나와 늘 함께 살고 있는 내 속의 데미안이 시간이 선물해 준 삶의 지혜들로 충만한 친구이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낮의 세계에 살면서 밤의 세계를 돕기도 하고 약간의 빛을 선사해 주는 영향력을 가진 쓸모 있는 인생을 살아가면 좋지 않을까
가엾은 싱클레어.
너의 고상하고 치열한 철학적 사유가 너 자신을 찾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단순한 면이 있고, 대부분의 선택은 번복할 수도 있단다.
그러니 너무 혼자서만 고뇌에 빠지지 말고 네 밖으로 나와 보렴.
(그리고 어리면 어릴수록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어느 정도 이해받을 수 있는 측면이 있어 ^^)
이래서 고전을 읽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