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고
관계가 증명되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무덤덤하고 다정함이란 찾아볼 수 없는 부모라도 자식이 위험에 처한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자식을 구하려 뛰어들고,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먹어지는 순간도 도래하며, 부모가 늙어 질병이 찾아오면 속절없이 짧아져가는 시간 앞에 더 착한 자식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유독 의지가 많이 되는 친구가 선별되는 순간도 있고, 일은 좀 깐깐하게 해도 저런 사람이 내 팀장이라는 게 다행이다 느끼게 되는 순간도 찾아온다.
사랑이나 감동만 확인하게 되면 좋겠건만 관계의 결정적 순간은 대부분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우며 예측하지 못한 상황인 경우가 더 많다.
노르웨이 출신의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도 어떤 일로 인해 새로운 관계 국면을 맞이한 부부가 등장한다. 변호사였던 남편 토르발은 곧 돈을 많이 버는 은행장이 된다. 그의 아내 노라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남편을 잘 돌보는 정숙한 여성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토르발은 아내 노라를 '귀여운 내 종달새'로 부르곤 하는데 사실 노라에게는 남편에게 말 못 했던 비밀이 하나 있었다.
남편 벌이가 시원치 않고 중병에 걸려 요양이 필요했었던 옛 어느 시절에 노라는 남편 몰래 지인이었던 크로그스타에게 빚을 지게 된다. 노라 부부 형편에 비해 큰돈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노라가 부채 계약서에 아버지를 보증인으로 작성하며 서명을 위조한 것이었다.
크로그스타는 남편 토르발과 한 직장에서 일하던 동료였는데 평소 업무 방식과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크로그스타를 해고해 버리고 만다. 해고 통지를 받은 크로그스타는 노라를 몰래 찾아와 남편에게 해고취소를 받아내지 않으면 노라와의 채무관계뿐 아니라 서류 조작 사실을 남편은 물론 경찰에 알릴 것이라 협박한다.
남편의 호칭대로 귀여운 종달새가 되어 돈 많고 멋진 집에서 평화롭고 부유하게 살고자 했던 노라는 남편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결국 남편은 이 사실을 알게 된다.
노라의 비밀을 몰랐을 때 남편 토르발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집에 돌아와서 단둘이 있게 되니 기분이 좋아. 당신은 정말로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이야!..(중략) 어째서 내 가장 소중한 보물을 쳐다보면 안 된다는 거지? 이 미인은 내 것, 오직 나만의 보물인 걸. 내 귀여운 노라, 재잘재잘 지저귀는 내 귀여운 종달새.."
하지만 노라의 비밀을 알게 되자 토르발은 속내가 분명해진다.
"지난 8년의 세월 동안 내 기쁨이요 자랑이었던 한 여자가.. 위선자에다가 거짓말쟁이였다니.. 그보다 더 끔찍한 범죄자였다니.. 당신 속에 숨여 있는 그 한없이 더러운 근성! 창피한 줄 알라고! (중략) 당신은 내 모든 행복을 파괴해 버렸어. 내 장래까지 다 망쳐 버렸다고. (중략) 경솔한 한 여자 때문에 내가 이렇게 비참한 수렁에 빠져야 하다니!.. 그리고 이것이 모두 밝혀지면 사람들은 내가 당신의 범죄를 부추겼다고 의심할지 몰라. 당신에게 아이들 교육을 맡길 수는 없어..."
조금 지나 어찌 저찌해서 편지공개 협박을 철회했다며 다시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 담긴 크로그스타의 편지가 도착하자 남편은 또 금세 마음을 바꾼다.
"노라! 이제 아무도 당신을 어쩌지 못할 거야. 오, 노라, 노라! (중략) 이제야 알겠어.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걸 믿을 수 없는가 보군. 나는 당신을 용서했어. (중략) 마음을 가라앉히고 예전처럼 편안해져야지. 겁에 질린 내 귀여운 종달새. 안심하고 쉬어요 내 커다란 날개로 당신을 감싸 줄 테니..."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라는 자신의 사회적 체면 만을 따지며 이기적이고 비열하게 구는 남편의 이중적 모습을 확인하게 되고 그 길로 그녀는 그 집을 떠난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의 인형으로, 결혼 후에는 남편의 인형으로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내, 여자, 딸 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해결해야 하지만 관계가 훼손될까 봐, 마음이 상할까 봐 문제 상황을 회피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부부나 부모자식관계처럼 친밀한 일상적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살아가며 모든 문제를 낱낱이 드러내며 해결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언젠가 해결해야 할 시점이 찾아오므로, 남몰래 아무도 모르는 문제적 비밀 하나쯤은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돈 문제일 수도 있고, 관계 문제일 수도 있다.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올랐을 때야 말로 그 사람의 진가를 확인하게 된다.
토르발은 노라에게 비난과 멸시를 퍼부음으로 그녀를 집에 있는 보기 좋고 말 잘 듣는 종달새나 인형같이 생각하고 있었음이 들통났고, 노라 역시 돈 많고 자신을 예쁘다 해 주는 남편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헌신하는 것처럼 살았지만 정작 남편에게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비밀 많은 아내였다.
잘 생각해 보자.
내 남편은, 내 부모는, 내가 좋아하는 그 친구는 나의 이런 모습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관점을 바꾸어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새롭게 알았을 때 어떻게 해 줄 것인가.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술자리, 유행 이야기 하는 피상적인 관계도 가끔 필요하지만,
살면서 더욱 중요한 것은 깊은 속내를, 격정스러운 감정과 사연을 꺼내 놓을 수 있는 특별한 관계가 더 필요하고 소중하다.
나를 종달새나 인형이 아니라 인생 여정을 함께 하는 파트너로 여겨주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고난과 고통에 처해 있을 때 힘이 되지 않을까.
남편 토르발은 아내 노라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난 사실 당신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에 놀랐어. 하지만 나는 당신의 남편이고 당신도 지금 그 일을 후회하고 있으니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갑시다. 왜 나한테 진작 얘기하지 않았어 바보같이. 우리는 부부인데 말이야"
나도 어느 날 남편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밝힌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마도 그동안 우리의 일상적 관계가 내 반응을 드러내지 않을까 싶다.
나는 적어도 '귀여운 종달새'로 불리지는 않았으니 토르발과 노라보다는 좀 더 현명하게 문제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