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을 때가 진짜 나

인생 후반전을 위한 하프타임

by 김태경

30대 초반까지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MBTI를 하면 외향형(Extraversion)이 거의 만점이었다. 그런데 30대 중반을 거쳐 40살 가까울 즈음에는 외향형과 내향형(Introversion)의 비중이 반반으로 달라졌다. 그리고 최근 했던 MBTI는 나를 내향적인 사람으로 분류한다. 그것도 꽤 많은 비중으로 말이다.

상황과 역할, 장소에 따라 태도나 대처가 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회사에서 나는 나름 똑 부러지게 말하고 이슈에 접근하는 걸 겁내하지 않고 필요한 경우 나서서 사람들과 어울려 상황을 조정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곤 한다. 하지만 회사가 아닌 곳에서는 낯가림이 심한 편에 수줍음이 많아 누가 말 걸까 봐 저 멀찍한 곳을 쳐다보곤 한다.

내게 주어진 역할이 나를 상황에 따라 행동하게 만드는 것 같다.


18년 간 회사에서 쉼 없이 일하다가 올해 육아휴직(아이들 다 커서 하는^^)을 시작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휴직한 지 4개월이 꽉 찬 지금도 아주 친했던 옛 친구들을 오래간만에 보는 일이 아니면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입사했던 20대 후반, 30대 초까지만 해도 쉬는 날은 무조건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쉬는 날을 허투루 보낸 것 같아 억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근데 지금은 아니다.

편하고 즐거운 사람들이 아니면, 혹여 누가 먼저 나를 만나자고 하는 게 아니면 굳이 안 나간다. 아마도 이건 내 몸의 에너지가 나름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일 거다. 그래서 아이들이 등교하는 오전 8시 40분부터 오후 4시 정도까지 나는 대부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혼자서 하는 거라곤 책 읽고, 글을 써내고, 운동을 하고, 음악 듣고 중간중간에 TV 보는 정도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이 시간들이 40대 중반을 넘어가는 내 인생의 후반전에 유익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2주에 한 번씩은 동네 도서관에 가서 장르불문 이 책 저 책을 꺼내다가 읽곤 한다.

한 권을 꼭 다 읽지 않아도 되고 도서관 어딘가 앉아서 책 읽었다가 햇빛 쬐다가 커피 마시다가 하늘 보다가 오늘 저녁밥 뭐 먹을까 생각도 하다가 브런치 글 또 뭘 써야 재미있을까 등등을 생각한다.

참 사치스럽고 호사스러운 일과다.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본 적이 있어야 가만히 앉아 햇빛만 쬐고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갑작스러운 질병에 눈앞에 캄캄해져 봐야 내 몸 어디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복이고,

1, 2만 원이 아쉬웠던 적이 있어야 오늘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충분하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래서 지금 이 혼자만의 시간을 킬링타임용 컨텐츠로 채우기가 싫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이제까지 내 인생 여정 전반전을 찬찬히 훑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 쓰고 싶다.


지금은 이 혼자 있는 시간들이 제법 익숙해진 탓인지 그 시간의 공간을 바꿔볼까 하는 욕심이 슬슬 올라온다. 북카페에 가 볼까, 지방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혼자서 기차여행을 다녀와볼까,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잘 만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극장을 좀 더 자주 다녀볼까..


어느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와 비슷한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예전에는 혼자 있으면 외롭고, 울적하고, 심심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혼자 있는 시간에 나는 에너지를 얻고, 내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역할을 좀 더 길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마치 전반전을 끝내고 후반전을 준비하는 축구경기의 하프타임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은 아직 경기를 시작도 못한 채 하프타임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을 테고,

하프타임 없이 헉헉 거리며 후반전을 뛰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하프타임이 15분이든, 1년이든, 주말 단 이틀이든, 여름휴가 1주일이든, 어떤 방식으로라도 하프타임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가급적 그 시간을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정비하는 혼자만의 시간으로 보내는 것을 추천한다. MBTI가 뭐든지 간에 누구든 이런 혼자만의 시간을 겪는 건 꼭 필요한 일인 것 같다.


비싼 명품 가방, 자동차 보다 나를 더 풍요롭고 정돈되게 만드는 것이 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이 시간을 얼마간이라도 누릴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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