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생기는 공간

버리기 위한 청소

by 김태경

20년 가까이 쉴 새 없이 일하다가 잠시 휴직을 결정하고 집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소였다.

청소는 그 목적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청소하는 사람의 성향이 반영되지만 나의 경우는 이렇다)


#1. 눈에 안 보이게 치우는 청소

회사 다니던 시절 내가 했던 대부분의 청소가 이거였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짐들을 이 서랍 저 서랍에 집어넣는다. 옷도 빨아야 하나 어째야 하나 헷갈리면 그냥 서랍에 넣는다.

주방도 빈통들은 다 찬장에 꾸역꾸역 넣고, 싱크대나 식탁 한쪽에 수납용 바구니 하나를 두고 목적이 불분명한 소지품들을 넣어둔다. 냉장고는 청소 구역이라기보다는 보관 구역이므로 자주 청소하지 않았더랬다.

베란다는 말할 것도 없다. 온갖 짐들 수납장에 넣고 한쪽으로 몰아두어서 다니기 걸리적거리지 않을 정도로 치워둔다.

빨리 치우고 또 해야 할 다른 집안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도 좀 쉬어야 한다.


#2. 배치와 수납 정리까지 하는 청소

회사 다닐 때 이런 류의 청소는 대략 반기별로 했던 것 같다. 여름옷 꺼내고 겨울 옷 꺼내는 것처럼 말이다.

근데 지금은 이런 청소가 잦아졌고 이 청소는 궁극적으로 버리고 비워내는 청소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배치와 수납을 정리하려고 하면 서랍장을 일일이 열어 봐야 한다.

사용하는 것, 사용하지 않는 것을 구분해서 보관하고, 입는 옷과 안 입는 옷을 따로 정리한다.

무언가를 버리는 결정을 쉽사리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3의 청소를 실행할 수 있다.


#3. 버리기 위한 청소

휴직하고 전업주부가 된 후로 집 전체를 뒤집어서 버리기 위한 청소를 한바탕 했다.

시간제한도 없었고 월요일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해 둘 필요도 없었으므로 한결 마음 편하고 수월하게, 충분한 구조 설계와 나름 기준으로 가지고 할 수 있었다.

버릴까 말까 가 고민될 때 나는 버렸다. (물론 살 빼면 입으려고 따로 넣어둔 옷은 조금 있다. 20년째 보관 중)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고자 중고로 팔 수 있는 책과 물건들은 따로 빼 두었고,

팔 수 없는 물건들은 기부 박스를 만들어 담아두었다.

아이들의 장난감과 (무수히 많은 소소한) 작품들은 아이들 없을 때 정리했다.

아직 좀 쓸 만한 물건이지만 내가 쓸 것 같지 않은 물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버리자 마음먹으면 또 못 버릴 것도 없다.

한번 버리고 나면 그다음 버리는 결정이 쉬워진다.

버리고 나면 자리가 생긴다. 어떤 공간은 빈 채로 그냥 두었고, 어떤 공간에는 꽃 화분을 사다 놓기도 했다.

이상하게 버리기 위한 청소를 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진다.

언젠가 쓸모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쟁여두었던 건데 막상 버리고 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다 추억이라며 꽁꽁 사둔 물건들 일부를 버린다 해도 내 추억은 그대로 있었다.

몇 차례 버리는 청소를 하고 나면 우리 집에 이렇게 수납할 공간이 많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 간 틈만 나면 사서 잘 정리해 보고자 했던 수납 서랍장, 빈 바구니, 빈 통들이 줄줄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더 이상 수납 목적의 생활용품은 구입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청소를 몇 차례 해 보니까 물건을 살 때 정말 필요한 건가를 한번 더 생각하게 되더라.

계속 사고 사서 집에 같은 물건이 많은지 아닌지도 알게 되어 소비 판단에 도움이 된다.

그러다 어느새 '나도 잘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버릴까 말까를 결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고민은 아니었었구나' 또 배우게 된다.


나는 계속 버릴 물건을 찾는다.

새로 사려면 버려서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필요를 곱씹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면서 내 마음도 정리정돈 되고 있는 중이다.


전업 주부의 일에는 철학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잘 버리고 바르게 채워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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