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장르의 집합체인 평범한 일상
<옐로카드>

최승은의 <나는 가끔 왕비가 되고 싶다>, <옐로카드>를 읽고

by 김태경

오랜만에 중고 서점에 들러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웃음 피식 나오며 다음 장에 있는 시가 궁금해지는 시집을 발견했다.

꽤 오래전에 쓰인 시집으로 시들은 대부분 '아줌마'가 화자였다.

사실 잘 모르는 시인이었고,

대형서점에서 더 이상 팔지 않는 시집이었지만,

시 구절구절마다 생생한 삶의 현장 속 복잡하고 지난한 자아와의 투쟁기가 고스란히 담긴 듯한 글이었다.

복잡한 한자도 없고, 비유나 은유, 이중의미 같은 것 없이

앉은자리에서 줄줄 흘러나온 듯한 이 시들을 보며

어떤 건 동질감에 웃고,

또 어떤 건 안타까워 쯧쯧 거리게 되더라.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고

고개 돌리면 어디나 있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도 그의 삶에서는 엄연히 주인공이다.

비록 나를 비추는 카메라가 내게 안 보일 뿐이다.


최승은 님의 시 2편을 소개한다.


나는 가끔 왕비가 되고 싶다

-최승은


정말 가끔, 아주 가끔씩

나는 왕비가 되고 싶다


손가락에 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옷자락에 먼지 한 올 묻히지 않고

그렇게 왕관 쓰고 엄청 폼 잡는

진짜 왕비가 돼보고 싶다


썰렁한 남편은 아주 가끔씩

나 같은 평민으로 살고 싶단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일한 만큼 신나게 먹고 마시는,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관여치 않는

진짜로 소박한 평민이 되고 싶단다


과연 둘 중 누가 중증 과대망상 환자인지

정답을 아시면 연락 바람



옐로카드

-최승은


당신,

내 일기장에 다 적어 두었다가

이담에 이담에 보여줄 거야


맨날 맨날

당신만 혼자 집에 놔두고

나,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러 다닐 거야

밤마다

지친 하루를 등에 업고

어설피 잠드는 나는

일기장에 꼬박꼬박

당신의 반칙을 적어둔다

당신에게 보내는

옐로카드


그 카드가 쌓이고 쌓이면

'선수퇴장'이라는 걸

당신은 알고나 계신지...



남편 험담(?)이 담겨 있는 그런 종류의 시라고 치부할 수 없는 글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밥은 전기밥솥이 짓고, 간식은 에어프라이가 만드는 것 같지만 아니다.

엑셀과 워드 프로그램이 알아서 보고서를 써 주는 것이 아니고, 직장 상사와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라치면 그냥 먹는 것 아니지 않나.. 머릿속으로 끈질기게 스몰 토크 거리 계속 생각 중...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순탄해 보이는 일상 같지만,

사실 모두 치열하다.

미스터리, 복수, 스릴러, 코미디, 로맨스까지 장르도 천차만별이고 빌런도 여럿이다.


삶이 담긴 시는 참 오묘하고 매력적이다.

짧지만 선명하고 간결하지만 여운 있다.

혹시 모든 사람이 시를 써 본다변 분노 게이지가 조금 낮아지게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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