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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기무라타쿠야 선생님

by 서광


3개월의 여유 생활비를 가지고 시작한 유학 생활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이곳은 온통 일본어로 가득한데 한국에서 1년간 배운 일본어로는 발음도 다르고, 단어 부족으로 현지 사람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그나마 알던 단어까지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꿈에 부풀어 오고 싶어 했던 곳인데 답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일만 시간의 법칙’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기까지는 적어도 일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난 3개월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기에 일본어를 가장 빠르고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모색했다. 어학당에서도 한국 유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간단한 인사 정도만 하고 내 생활의 모든 부분을 일본어만 사용하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한국 음식도 먹지 않았다. 다행히 난 김치를 좋아하지 않았고 매운 음식 잘 먹지 못해 담백한 일본 음식이 너무 잘 맞았다. 문화를 먼저 익히면 언어는 자연스레 몸에 스며들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독하게 생활하다 보니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코리아 타운이 있었는데도 난 5년 동안 몰랐었다. 보글보글 한국식 된장찌개와 아삭한 총각김치에 흰 밥이 먹고 싶어 5년 만에 코리아 타운에 갔다. 그립던 고향의 맛을 마음껏 즐겼다. 6개월 비자만 받고 금방 귀국하겠다고 약속하고 떠난 딸이 5년 동안 한국에도 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 마음도 모르는 철없는 독한 아이였다.

어학당에서 배운 일본어로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 답답함이 너무 컸다. 텔레비전 속 드라마를 보다가 대사를 암기해 보기로 결정했다. 남녀 주인공의 대사가 생활 일본어 아닌가. 언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서는 그 나라 사람과 연애를 하라고 했듯이 나도 드라마 속 주인공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 아이돌 그룹 SMAP 멤버 중 木村拓哉(きむらたくや/기무라타쿠야)였다. 1996년 전국 시청률 29.6%를 기록한 롱베케이션 드라마를 50회 이상 봤다. 드라마 OST' LA LA LA LOVE~~~ SONG'과 여주인공이 부르는 ‘세나’라는 이름 덕분에 시청률은 급상승했다.

처음에는 그냥 화면 속 남녀 주인공만 봤다. 점차 들리는 단어를 노트에 적고 반복해서 10번 정도 보다 보면 사전을 찾지 않아도 적어 놓은 단어의 뜻이 어렴풋이 들린다. 50번쯤 보면 대략적인 의미를 알게 된다. 50번 보고 난 이후에 비로소 사전을 찾아 정확한 뜻과 의미를 알고 다시 한번 보면, 드라마 속 생활 일본어는 반강제적으로 암기 수준이 된다. 남녀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씩 다른 일본어는 무작정 외운 기무라타쿠야의 남자 언어로 문맥도 어휘도 맞지 않게 대화하다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언어는 뻔뻔함이라고 했던가. 그럼에도 꾸준한 반복 학습으로 3개월도 되기 전에 난 아르바이트에 합격했다.


어학당에서 일본어를 가르쳐주던 동갑내기 선생님 하고도 친구가 되고 싶었다. 대학원생이었던 선생님은 한 학기 수업을 끝으로 퇴사를 하고, 헝가리로 일본어 교사로 파견 예정이었다. 난 일본인 친구가 필요했고, 서툰 일본어로 친구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우린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 덕분에 친구 집에도 갔다. 놀러 갔던 날 어머니가 ‘일본전골’라는 불고기전골을 만들어 주었다. 일본은 우리처럼 반찬이 많은 것이 아니라 딱 필요한 만큼 소량의 쯔케모노만 있고, 전골 소스에 날 계란이 들어있는 개인 접시가 있었다. 낯설고도 어색한 식사문화였다. 간장 양념의 고기를 건져서 날 계란에 찍어 먹는 음식이라니. 대부분 음식의 기본양념은 간장, 설탕, 미림 또는 맛술이 전부였다. 밥그릇은 들고 먹어야 하고 반찬도 개인 접시에 먹을 양만큼 덜어 놓고 음식을 씹을 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먹어야 하는 문화는 불편하지만 신선한 경험이었다.

친구 동생 결혼식에도 초대되었다. 일본 결혼 문화는 초대한 사람만이 참석할 수 있어 초대장을 받은 뒤 다시 참석 여부를 체크해서 보내야 한다. 결혼식 끝나고 귀가할 때 답례품을 주기 위함이다. 부조금도 3만 엔, 5만 엔으로 정해져 있다. 물론 결혼식 용도의 봉투로 따로 구매해야 한다. 한국의 결혼식은 본인 결혼식이어도 부모님, 친인척 알지 못한 분들이 대부분 참석하지만, 일본은 결혼 당사자 중심의 결혼식이 진행된다. 축하받고 싶은 분들만을 초대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하며 진정성 있는 자신들만의 진짜 결혼식을 피로연을 포함하여 4~5시간 진행한다. 친구 덕분에 일본 문화를 글이 아닌 현장에서 보고 익힌 귀한 경험도 했다.

기무라타쿠야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서툰 일본어로 용기 내서 일본인 친구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인 친구를 만나면서 다양한 일본 문화를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기무라 선생님이 결혼도 하고 딸 둘을 둔 아저씨로 변하긴 했지만, 일본 사회로 첫발을 디딜 수 있게 용기를 준 나의 첫 번째 일본어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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