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비자로 아르바이트 조건은 1일 4시간, 주 28시간만 가능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는 쉽게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었지만, 난 조금은 더디더라도 일본인 운영 하는 곳만 찾았다. 기무라 타쿠야 선생님 덕분에 2개월 반 만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ERAWAN’ 일본땅에서 첫발을 내딘 곳이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태국요릿집. ‘에라완’ 은 머리가 세 개 달린 코끼리 신이란 뜻이다. 신주쿠 한복판에 코끼리 두 마리가 매장 입구에 있고 긴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2층 전체가 식당이었다. 자동문을 열면 바로 앞에 안내 카운터가 있었고 매장 한가운데 바텐더가 있었다. 바텐더를 중심으로 좌우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꽤 큰 태국 요리 식당이었다.
아직은 미숙한 일본어로 아르바이트 첫 출근을 하니 태국 유학생이 대부분이었고,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그곳의 공통어는 일본어였기에 나에게는 너무 좋은 환경이었다. 금박 테두리를 감싼 전통 한복 같은 상하의 유니폼이 처음 입어본 태국 전통 의상이었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점심도 먹을 겨를 없이 바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3~4시간 근무를 하면 저녁 식사를 주는데, 태국 요리는 특유의 향신료 때문에 배가 고팠는데도 난 제대로 먹지 못했다. 태국 음식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3개월 이상 걸렸다. 덕분에 반강제로 다이어트가 되었다.
스케줄 근무로 주말에는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본 매장은 대부분 사기그릇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주말이면 무거운 사기 접기를 들고 하루 종일 움직이다 보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정신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주말 점심은 뷔페 형식으로 매장을 운영했는데, 식판 위주로 설거지가 나와서 주말에는 설거지 파트로 배정을 희망하기도 했다. 때론 말하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서 주방에 들어가서 초벌 설거지를 해서 기계에 넣는 일을 했던 적도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이런 말이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젊어서 고생하면 나이 들어 골병든다’ 이게 맞는 말이다. 부모님 도움 없이 나 혼자 해보겠다고 온 유학행이다 보니, 난 학비도 내야 하고 생활비도 벌어야 하니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시간 쪼개가며 질리도록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땐 20대 초반이라 힘들어도 자고 나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했다. 그렇게 질릴 만큼 아르바이트를 하며 20대를 보냈다.
에라완에서는 힘든 일만 있었던 아니었다. 4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태국, 라오스, 중국, 홍콩, 다국적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문화도 익히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힘들지만 즐겁게 지냈다.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도 달랐지만 우린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들이었다. 그 당시 1개밖에 없는 라오스 대학 국비 장학생도 있었다. 상위 1% 집안의 친구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정신도 육체도 참 건강한 친구들이었다. 라오스 친구들은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패스트푸드를 먹어 봤고, 높은 건물들도 처음 봤다고 순수한 눈망울로 이야기했다. 낯설었던 태국 음식도 코끝 찡그리게 했던 고수와 레몬 글라스, 비린내 가득한 피시 소스, 세계 3대 요리인 시큼하고 매콤한 똠양꿍, 지금은 나의 최애 음식이 되었다.
일본에서 만난 유학생들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고국으로 돌아가서 유학을 통해 배운 것들을 본인 나라에 기여하겠다고 했다. 한국인 대부분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고 귀국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화 충격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때, 밤 12시만 되면 길 건너 가부기 쵸 라는 곳에서 애잔하고 쓸쓸한 경음악으로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고된 내 삶도, 비자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의 한 맺힌 구슬픈 목소리로 들리곤 했다.
한국에서는 만날 수 없는 북조선 사람들도 많이 만났었다. 우리 집 근처에는 조선 학교가 있었다. 검은색 한복 치마에 흰색 저고리를 입은 제일 교포들이었다. 옷차림과 달리 그들의 언어는 일본어였다. 일본에서 태어난 2세 , 3세였던 것이다. 부모님의 국적이 북한이다 보니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 문화 밖에 모르지만, 국적이 북한이다 보니 모든 것에 제한되는 일들이 많았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에도 너무 가보고 싶어 하고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북한 국적 때문에 유일하게 한국만은 갈 수가 없고, 일부 나라에서는 제한이 있어 어렵지만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도 처음에는 선입견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코가 2개인 줄 알았다. 텔레비전 속에서 듣던 북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어색하고 무서웠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알게 된 북한 친구가 있었다. 일본에 유학 온 한국 여성과 사귀게 되었는데 한국 집안에서의 반대가 너무 심해 헤어지게 되었다며 한국 사람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슬프고도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신주쿠에는 아직도 에라완이 있다. 내 청춘의 열정을 쏟았던 그곳이 내가 변한 만큼 많이 변했겠지만 올해는 다시 한번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