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첫째 주 어느 날.
일본의 겨울은 아무리 추워도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두 번째 유학을 떠나던 그날은 영하의 날씨가 아닌데도 체감 온도는 영하권이었다. 다시 한번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나는 설렘보다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두려움이 컸다. 함께 출국하기로 한 만 18세 일본인 친구도 긴장한 탓인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열 때문에 출국이 미뤄진 상황으로 결국 홀로 일본에서 대만으로 출국하게 되었다. 나리타 공항은 여행의 설렘으로 분주한 사람들 속에 홀로 웃음기 없이 의연한 척 출국장을 빠져나갔다. 일본 유학 때처럼 대만행 비행도 순조롭지 못했다. 2시간 비행시간 중에 1시간 정도 비가 많이 와서 상공 위를 돌다가 3시간을 조금 넘은 시간에 겨우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했다. 타오위안 공항에는 자매 학교인 담강 대학 담당자가 마중을 나온 상태였으나 연착되어 5시간 정도 뒤에야 만날 수 있었다. 두 번째 유학은 그렇게 폭우 속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1년 동안 지낼 곳은 대만 학생들이 거주하고 있는 여자 기숙사였다. 6평 정도 되는 작은 방에 2층 침대가 두 개 있었고 4명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침대 앞에 책상 네 개가 붙어 있었고, 방 문 바로 옆에 세면도구를 넣는 서랍장과 한 명 정도가 겨우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둥근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이 있었다. 일본에서 파견된 유학생 2명이 온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일본에서 파견된 한국인과 일본인을 만나러 삼삼오오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내 방에 모여들었다. 폭우에 겨우 짐을 들고 온 나에게 들리지 않는 중국어로 쉼 없이 질문을 하던 친구들이었다. 나의 룸메이트 들은 딱 봐도 공부 잘하는 우등생들. 정신없는 와중에도 캐리어를 열어 선물 나눔을 하며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나누고 그 친구들에 이끌려 근처 슈퍼에 가서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사고 나서야 나에게도 짧은 휴식이 찾아왔다. 늦은 시간까지 공복 이어서 룸메이트 들과 근처 식당에 가서 대만식 가정식 요리를 첫 끼로 먹었다. 못 알아 들어도 한자뿐인 메뉴를 설명해 주는 착한 친구들.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친구들 덕분에 노곤했던 첫날의 피곤함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담강 대학 유학생의 시작은 아시아, 유럽 유학생들과 유학 센터에서 1~4교시까지 중국어 기초부터 수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 시간이다. 한국으로 말하면 연/고대 정도의 큰 사립 대학으로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대만 드라마 ‘꽃 보다 남자’를 촬영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난 일본 대학에서 4학년 8학점만 받으면 졸업을 하기로 공개적인 약속을 받고 온 상황이라 다른 유학생 보다 자유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대만의 경우는 전공 수업은 중국어와 영어를 선택해서 들을 수가 있다. 룸메이트의 소개로 국제 비즈니스 학과 친구를 만나게 되어 중국어로 청강할 수 있게 되었다. 룸메이트가 적어준 교실로 가서 중국어로 청강을 한 후에 담당 교수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수업을 듣고 싶다고 요청했다. 대만은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어 2월은 이미 2학기가 시작되는 시기로 더욱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의 부탁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편의를 봐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2과목 이수를 해야만 졸업이 가능한 나만 가슴이 막막했다.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했다. 담당학과 교수님들 이력을 검색하다 보니 일본어가 가능한 교수님을 찾을 수 있었다. 일본어 수업도 진행하고 있어서 들이대기 권법을 사용했다. 룸메이트에게 물어 예의 있게 인사하는 방법, 수업을 받으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간절함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지 글로 행동으로 배워서 교수님과 대면했다. 일본어 수업 때 맨 앞자리에 앉아 계속 미소만 지었다. 갑자기 낯선 아이가 수업하는 곳에 있으니 황당해했지만 질문도 쳐다보지도 않는 무시하는 태도를 유지하셨다.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교수님을 쫓아나가 뒤돌아 보지 않는 뒤태에 일본어로 계속 이야기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니 뒤돌아 보며 ‘개인 사정을 왜 봐줘야 하느냐’며 냉정하게 가버리는 것이다. 좌절과 절망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졸업이라는 간절함이 있다. 다음 수업 때에도 대만 학생들의 주목을 받으며 난 맨 앞자리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날 봐 달라는 애절한 눈빛을 가득 담고 기초 일본어 수업을 들었다. 3주 정도가 지나자, 교수님이 보조 역할을 하라며 마음을 내어주셨다. 날개를 달 듯 학생들 일본어도 봐주면서 끈질긴 구애로 교수님의 국제 비즈니스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곳도 일본의 ‘제미’와 같은 시스템이 있어 몇몇 학생과 교수님이 모여서 토론하는 형태의 동아리가 있었다. 수업 듣기 전에 교수님이 처음 추천한 곳이 동아리 모임이었다. 한국어로 들어도 어려운 경제, 정치, 국제 무역등 수업 내용이 다이내믹했다. 난 맨 앞자리에 앉아서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어려운 듣기 평가를 3시간씩 들어야 했다. 3시간 동안 두꺼운 전공 서적의 빼곡히 적혀 있는 한자와 중국어 충격으로 없던 두통에 시달렸었다. 어렵게 만든 자리인 만큼 두통이 와도 결석 없이 그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난 많은 양의 밥을 먹어도 정신적 스트레스로 대만 거주 1년 동안 몸무게는 10 킬로 그램이 빠졌다. 교내 캠퍼스에서 음주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업 끝나고 캔맥주 한 두 캔을 마시고 나서야 방으로 갈 수 있었다. 6개월을 겨우 버텨 전공과목의 기말 시험도 봤고 시험 문제와 별개로 난 내가 외운 수많은 한자들을 적어 시험지를 메꿔 나갔다. 한자를 열심히 암기한 노력 점수와 끈기 점수로 커트라인 60 점을 내게 주셨다. 두꺼운 전공 책자의 한자를 보면 구토가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난 나 와의 약속 하나를 지켜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