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체유심조 Feb 22. 2024

친정엄마가 사흘 밤잠을 못 주무셨던 이유...

  결혼날짜를 잡아 놓고서 친정엄마는 사흘 밤잠을 편히 주무시지 못 하신다. 나이 꽉 찬 딸이 시집을 간다고 하면 시원해서라도 좋아하실 텐데 엄마 마음은 왠지 불편하시다. 시할머니를 비롯한 대식구와 넓은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보내는 엄마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나는 긴긴 밤이다.    

 

  결혼 후, 집 안의 대소사, 특히 기제사를 지내는 일이 나에게는 생소한 경험의 시작이었다. 일 년에 다섯 번의 기제사와 명절차례를 합치면 두어 달에 한 번씩 치러내야 한다. 더불어 명절 차례상을 차리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처음으로 제사 음식을 준비하면서 시어머님께서 무를 씻으라고 하셨다. 나는 시키는 대로 무에 붙어있는 흙을 깨끗하게 씻어서 어머님께 드렸더니 “무시도 제대로 못 씻나”라며 핀잔을 주셨다. 나는 분명 잘 씻었는데 왜 그러시나 했더니 무 껍질을 깎으라는 말씀이셨다. 군말 않고 시키는 대로 다시 일을 하긴 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껍질을 깎으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셨으면 두 번 일을 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궁시렁 거렸던 일이 있다. 이런 잔잔한 일들이 시집살이라고들 한다. 그 후로도 더러 일에 있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큰일들에 몸도 마음도 익숙해져갔다. 


  명절 차례는 더욱 일이 많다. 시댁 8촌이 같은 동네에 살다보니 반나절에 걸쳐 차례행사가 끝이 난다. 제관들이 모두 모여 이집 저집에 차례를 지내다보니 아랫동네에 사는 우리집은 거의 점심때가 되어야 차례 순서가 된다. 제관도 얼마나 많은지 넓은 거실이 꽉 찰 정도다. 차례가 끝나고 모두 돌아가고 나면 어른들에게 명절 인사를 드린다며 수시로 손님들이 찾아오신다. 그리고 명절 다음날은 시댁 형제식구들이 모두 모인다. 명절연휴 3일 동안은 주방에서 꼼짝없이 세월을 보내야하는 것이 나의 명절 모습이었다. 그러다보니 명절에 친정에 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친정엄마는 내 사정을 아시지만 가끔은 명절에 다녀가지 않는 딸네를 서운해 하시곤 했다.      

 나는 나의 선택에 의해 집안에서 효부(孝婦)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세월이 익은 후에야  벼슬도 명예도 아닌 나를 옭아매는 감옥살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엄마가 사흘 낮밤을 뜬눈으로 지내신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제대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서 기제사도 명절 차례 지내는 모든 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한다는 절실함이 일었다.  

  그 후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남편의 결단에 의해 모두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제사문화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서운함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무거웠지만 한 생각을 내려놓으니 주변 사람들도 환영의 목소리를 보냈다. 2년 전 시어머님 돌아가신 후부터는 명절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살아생전에는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집안사람들의 인사행렬이 길었었지만 이제는 시어머님도 안 계시고 우리도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명절이라고 특별히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다. 물론 시댁 형제들은 날을 잡아 우리 집에서 명절 모임을 가지긴 하지만 굳이 복잡한 명절이 아니어도 된다. 멀리 사는 아이들도 번잡스러운 명절에 움직이지 않고 미리 인사차 다녀가다 보니 오히려 명절이 적막하리만치 조용한 날이 되었다.      


  올해는 특별한 명절연휴를 계획했다. 조용함을 벗어나서 번잡한 도시에 빠져보자는 것이다.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를 들려 주고싶다”는 ‘여수밤바다’ 노래처럼 밤바다를 보기 위해 여수로 향했다. 처음으로 명절에 나서는 여행인지라 망설여졌다. 남편은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라며 일정을 밀어부쳤다. 그래도 혹시 손님이 오거나 시댁 형제들이 오면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자기가 조치를 다 해놓았으니 갔다 오면 된다고 한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이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수앞바다는 남쪽바다의 따스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오동나무가 유난히 많은 오동도에는 이른 봄소식으로 동백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방문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쇼를 보기 위해 거금을 들여서 크루즈를 탔다. 선상에서 쏘아올린 불꽃이 멋지게 하늘을 수놓을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여수밤바다를 축제의 장으로 넘실거리게 했다. 다음날 아침에 눈앞에 펼쳐진 숙소 앞바다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늦잠을 잔 탓에 해돋이를 보지 못하고 다음에 또 오리라는 무책임한 약속을 바다에 던지며 명절 여행은 끝이 났다.      

  이제는 언제든지 마음가는대로 떠날 수 있다. 지난 시간들을 잘 견뎌냈기에 지금에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작가의 이전글 두 번째 절기 '우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