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마나!
며칠째 겨울비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때 이른 봄비라고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헷갈리는 비가 연일 내리고 있다. 잠시 내리던 비가 숨고르기 할 쯤, 긴 우중의 지루함을 털기 위해 마당으로 내딛는다. 황금색으로 겨울을 덮고 있는 잔디밭으로 빗물들이 촉촉하게 스며있다. 빗물의 찰박거림이 좋아 발장구치며 놀자니 화단 어느 쯤에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뭐지” 싶어 돌아보니 화단 한 켠에 튤립 싹이 땅 위로 빼쪼롬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나 이제 세상 밖으로 나왔어요”라며 자랑이라도 하듯 당당한 모습에 내 입에서는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다. 집나간 자식이 돌아온 것 같은 반가움에 보고 또 보자니 해마다 봄이 되면 만나는 아이인데도 새롭고 또 새롭기만 하다. 지난 가을에 구근을 심어놓은 이래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이겨내고 세상 밖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튤립이 그저 기특하기만 하다.
계절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세상 속으로 스며든다. 일 년 24절기 중 첫 번째인 입춘(立春)을 시작으로 계절의 변화는 시작된다. 두 번째 절기인 우수(雨水)는 ‘대동강 물이 풀리게 되는 날’이라는 속담이 있다. 겨울 추위가 끝나가고 봄바람이 불어오니 땅에는 새싹이 트고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절기이다. 비로소 입춘과 우수는 겨울의 마무리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라 할 수 있다. 숲속의 나무들도 겨울의 회색빛 외투를 벗어버릴 준비를 한다. 비로소 앙상하였던 겨울 나뭇가지에도 수채화 물감으로 찍어놓은 듯 연둣빛이 감돌기 시작한다. 개구리가 잠에서 깬다는 경칩(驚蟄)은 세 번째 절기다. 하지만 때 이른 포근한 날씨로 선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2세 준비 하느라 분주하다. 숲속 옹달샘에는 개구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젤리모양의 개구리알을 낳느라 여념이 없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안으로만 웅크려 있던 사람들도 어느 가수의 ‘때 이른 봄 몇 송이 꺾어다 너의 방 문 앞에 두었어’라는 노랫말처럼 문득 찾아온 봄 앞에 기지개를 켠다.
때 이른 봄의 전령으로 텃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볍다. 묵은 겨울밥상에 초록 야채로 활기를 주었던 작은 온실은 거둬내고 봄의 따스함으로 환기를 시킨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잎이 노랗게 말라가던 겨울초도 때 이른 봄비에 생명수를 얻은 듯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으로 살아난다. 지난 가을에 뿌렸던 시금치 씨앗은 겨울이 채 오기 전에 겨우 손톱만큼의 크기로 세상 눈치만 보고 있더니 어느새 엄지손가락만큼 자라났다.
이렇듯 자연은 스스로의 이치에 따라 저절로 피고 진다. 인간도 자연의 한부분인 것을, 저절로 갈 때가 되면 가고, 올 때가 되면 온다는 것을 안다면 그저 있는 그대로 지금이 가장 행복할 때이다.
높은 나뭇가지 끝에 걸터앉아 세상을 노닐던 까마귀 한 마리가 문득 봄을 재촉하듯 “까악까악”울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