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체유심조 Sep 05. 2023

남편은 고추대장

 “어허 고 녀석들 튼실튼실 하구먼”

남편이 고추밭에만 다녀오면 기분 좋아 하는 말이다.

남편은 지난 5월초에 고추 모종을 심은 후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리러 고추밭으로 내려간다. 작년 가을, 고생 끝에 겨우 4근 수확이라는 매운 맛을 본 고추농사다. 농사라는 것이 쉬운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유독 고추농사는 어려운 것 같다. 병충해에 민감하여 탄저병 약을 뿌리지 않으면 빨갛게 익자마자 병들어 못 먹게 된다. 나름 친환경 농법을 주장하는 우리는 약을 치지 않고 키우다 보니 정성과 부지런함은 배가 되어야 한다. 작년의 실패를 거울삼아 올해는 더욱 분발하여 풍성한 수확의 맛을 보리라는 각오로 남편의 몸과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틈나는 대로 유튜브 영상과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밤낮으로 고추밭을 오가며 정성을 들이고 있다.      

사람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다는 걸 남편을 보면서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다. 귀촌하기까지는 농사의 농자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어설픈 초보농사꾼에다 확실한 고추대장 폼이다. 한 가지 일에 꽂히면 꼼꼼하고 세심하게 파고드는 성격이다. 그러나 농사라는 것이 내 마음 먹은 대로 절대 되지 않고, 될 수 없다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부지런을 떤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고 나면  잘 자라도록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려줘야 한다. 농약을 치지 않고 자연의 힘으로 키워야하기에 더욱 열심히 밭을 오고가며 주인의 눈길과 손길을 보낸다. 

자칫 우려를 범할 수 있는 것이 내가 텃밭의 주인이라는 오만함이다. 내가 뿌린 씨에서 싹이 나고 결실을 맺으니 그 기쁨의 맛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결국은 자연이 가꾸고 키운 것일 뿐 이라는 것이다. 어쩌다 텃밭에 뿌린 씨가 비바람에 쓸려가 버린들 어쩌겠는가. 몇 년 동안 예쁜 꽃을 피우며 나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던 꽃나무가 쓰러진들 어찌하겠나.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스피노자가 한 말이 텃밭 정원을 하면서 알겠더라. 모든 것은 자연의 순리 속에 맡길 뿐이라는 사실이다.     

오늘은 태풍 ‘카눈’의 북상으로 온 나라 안이 초비상 상태이다. 아랫동네에 살 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던 자연재해들이 지리산으로 터를 잡고부터는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거기다 산속 해발 400m의 높은 고지에 살다보니 낮은 곳보다 하늘의 흐름에 긴장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맑던 하늘에 순식간에 검은 구름이 그 무게를 못이기고 금새 비를 흩뿌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비바람에 숲들은 초록의 파도물결을 이룬다.텃밭과 정원의 작물들은 오롯이 세상의 흐름에 내 맡긴 고고한 모습이 경이롭기만 하다. 

                                                       햇볕에 말리고 있는 빨간 고추


남편은 태풍이 온다는 소리에 태풍설거지 하러 고추밭으로 내려간다. 간간이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고춧대를 다시 더 단단하게 묶어준다. 혹시 비바람에  빨갛게 익은 고추가 하나라도 떨어지고 병들까봐 미리 수확을 하느라 물에 빠진 생쥐 모습이다. 지난번에도 비를 맞으면서 일을 한 뒤 감기로 고생한 적이 있어서 연일 그만하라고 다그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성으로 보살피고 가꾸는데 혹시라도 비바람에 빨갛게 익은 고추들이 떨어지면 얼마나 마음이 상할까 생각하면 남편이 이해가 된다. 한참을 고추밭을 오가며 따온 빨간고추 한소쿠리에 울린 나의 탄성이 마근담을 울린다. “우째 이리 실하고 색깔도 곱노 역시 당신은 고추 대장이야 하하”라며 칭찬을 늘어놓는다. 젖은 옷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도 남편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다. 어차피 맞은 비라며 수돗가에서 따온 고추를 깨끗하게 씻어서 안으로 들려준다. 나는 받아들며 연일 “고맙다”며 칭찬을 날린다. 

고추는 수확도 중요하지만 고추 말리는 일도 중요하다. 먼저 고추에 스며 있는 습기를 날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눅눅한 상태로 상해버리기 때문이다. 태풍이 지나갈 동안 발코니에서 시원한 선풍기 바람으로 샤워를 시키려 대소쿠리에 하나하나 예쁘게 줄을 세운다. 소쿠리에 줄줄이 누워 있는 빨간고추가 한아름 예쁜 꽃으로 다시 피었났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의 얼굴에는 입이 귀에 걸려 있다. 내일쯤에는 마당 그늘에서 또 시원한 자연의 바람을 쐬고 다시 건조기에서 바싹 말려야 한다. 

앞으로 우리집 밥상을 풍성하게 해 줄 아이들을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대소쿠리를 만지는 내 손길도 정성을 다한다. 고춧가루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있다. 그래도 반은 달려왔으니 그것만으로도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태풍으로 비바람이 내려치는 고추밭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고추밭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고추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남편에게 “내년에도 우리 집 고추를 잘 부탁합니다!”라며 설레발을 친다. 

고추대장님!!! 

작가의 이전글 잘 먹고 잘 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