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칼의 아주 특별한 질문

데보라 프리드만, 비룡소

by 반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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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신장 한쪽을 이식해 준 후로 저도 건강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먹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었고 내가 한 음식은 너무도 내 입맛에 딱 맞아서 음식을 만드는 시간도 즐거웠고 먹는 시간은 더 행복했습니다. 작년 건강검진 후 고지혈증 수치가 매우 높게 나왔습니다. 정상 수치의 3배는 넘는 수치였습니다. 이것이 내 한쪽 신장이 없어서 올라간 수치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이식 검사를 할 때부터 문제를 일으켰던 수치였습니다. 이식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다행히 수술은 잘 진행되었지만 이식 이후 한쪽 신장만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높은 고지혈증 수치는 문제가 됩니다. 한쪽 밖에 없는 신장이 일을 하는데 무리를 주는 수치기 때문입니다. 혈액 속, 몸속 노폐물을 걸러주어야 하는 신장에게 피 속 기름끼는 훗날 동맥경화나 고혈압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인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동맥경화나 고혈압은 결국 신장에 무리를 주게 되고 하나뿐인 신장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 저는 공여자로서 삶의 의미를 잃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수술 후 3년을 띄엄띄엄 약을 먹다 말다 수치가 놓아졌다 나빴다를 되풀이하다가 올해부터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내가 아프면 나중에 내 아이들에게 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 꾸준히 약물치료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부지런히 약을 먹고 수치는 정상이 되었지만 의사 선생님의 단호한 말씀이 귀에 박혔습니다.


살을 빼는 게 모든 수치에 도움이 됩니다.


잘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동안 실천하는 게 싫었습니다. 술, 담배, 기름진 음식, 육류를 거의 하지 않지만 탄수화물 러버인 입맛에 음식 조절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이 찐 것도 인정하지만 아이들 셋 낳으니 어쩔 수 없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습니다. 한 마디로 운동이 귀찮았습니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었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께서 이렇게 살면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이들을 두고 일찍 죽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새벽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소 출근시간대로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 공복 유산소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며칠은 힘들었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싶어 열흘째 포기하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며칠간 긴 장마의 끝이라 그런지 아침 운동을 하는 첫날부터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아파트 놀이터 아스팔트 바닥마다 지렁이가 말라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피부가 미끌한 동물들을 너무 싫어하는 편이라 걸어가면서 보이는 지렁이 한 마리 한 마리가 너무 징그러웠습니다. (지렁이야 미안해.) 이리저리 피해서 밟지 않으려고 땅만 보고 걸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해가 뜨면서 햇살이 놀이터 바닥에 덮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햇빛 한 줄기가 열심히 땅을 기어가고 있는 지렁이를 당장이라도 삼킬 것 같았습니다. 털도 없고 피부도 약한 지렁이에게 저 햇살이 얼마나 뜨거울까 싶더군요.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자비심이 올라왔습니다.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낙엽들을 양손에 쥐고 지렁이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린 피부에 거친 것이 닿이니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온몸을 비틀어가며 저항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당장은 아프겠지만 지금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라도 달래서 꿈틀거림을 좀 줄이고 싶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지렁이가 징그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슷하게도 지렁이들은 서너 번 꿈틀거리며 몸을 비틀고 나면 결국에는 얌전하게 나뭇가지에 몸을 반으로 접어 걸쳐집니다. 저항을 하다 포기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포기라기보다는 순순히 몸을 내 맡기는 기분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죽은 척하는가 싶기도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빨래마냥 널브러진 지렁이를 화단가 나무 그늘 밑으로 보내줍니다. 조금이나마 시원한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라고 말입니다. 뜨거운 아스팔트 보다는 흙덩이 위가 더 시원할 것 같습니다. 운이 좋아 오늘 비라도 내리면 더 살 수 있을 텐데 싶지만 일단 구출해 주는 제 몫은 여기까지입니다. 사람들의 발에 밟힐까 이미 말라붙은 동료들처럼 죽음은 미뤄주고 싶어 저는 요즘 아침마다 지렁이 구출작전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한두 마리가 아닌 지렁이를 구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지체됩니다. 운동을 얼른 하고 들어가 가족들의 아침밥도 차려야 하는데 정해진 한 시간 내에 지렁이를 구하는 시간이 많이 소비됩니다. 그냥 모른척하고 내 운동이나 해야지 하다가도 길가를 열심히 기어가는 녀석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온 신경을 집중해서(지렁이가 절대 내 손에 닿이지 않도록) 지렁이를 구하다 보면 한 마리 구하고도 땀이 뻘뻘 납니다. 그래 이것도 운동이 된다 싶어 오늘도 열심히 지렁이를 구했습니다.


지렁이 칼은 매일매일 딱딱한 흙을 갈아엎어 보드라운 흙으로 만들지만 지나가는 동물들이 왜 그렇게 하냐는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자신이 하는 일에 이유가 있는데 칼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지요. 하던 일을 멈추고 답을 찾아다니는 동안 딱딱하고 말라붙어버린 흙에 애벌레가 살지 못해 먹이를 구하지 못하고 울고 있는 딱정벌레를 보면서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깨닫고 다시 일을 하게 됩니다. 아주 작은 지렁이가 땅을 살리고 다른 동물들을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지렁이의 삶의 의미입니다. 아침마다 땅으로 기어 나와 돌아다니는 지렁이를 보면서 지렁이 칼이 떠올랐습니다. 길을 잘 못 들어 뜨거운 땅에서 꿈틀거리는 이 아이들을 얼른 흙으로 보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도 칼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둘째 딸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내가 맡은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가르치면서 제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았고 아픈 남편에게 신장 한쪽을 공여하면서 내가 태어난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남들이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일을 하며 이게 '진정한 내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을 셋 낳아 기르면서 이 또한 엄마로서 내 의미 있는 삶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항상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에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삶에 '나'는 과연 어디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있어 꼭 필요한 것들을 이루고 나니 비로소 내가 돌아봐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건강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해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 책을 가지고 싶은 것이 오랜 바람이었습니다. 비록 판매처도 출판사도 없는 자가출판이지만 내 책을 내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검색창에서 내 이름을 찍었을 때 내 책이 뜨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동안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접어두었던 모든 것들을 재능이 없으면 어때 죽기 전에 해보는 거지라고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소소한 것들이 이제는 삶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나무젓가락을 하나 들고나가려고 합니다. 매번 길에서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지렁이를 잡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습니다. 이제 잘 잡히는 나무젓가락으로 살짝 집어서 흙 속으로 보내주고 제 운동시간을 더 챙겨보려고요. 칼의 친구들을 집으로 보내주고 나면 다른 동물들도 먹이를 더 많이 얻게 되겠지요. 올 가을 파란 하늘을 날아다닐 잠자리와 들판을 뛰어다닐 메뚜기들을 위해 내일도 열심히 지렁이를 잡아주는 줍사가 되려고 합니다. 제 삶에 뿌듯함이라는 의미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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