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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Oct 25. 2022

잠자리의 마지막 몇 시간

낙엽을 쓸다 보니 옥상 선반 아래 바닥에 잠자리가 등을 대고 누워있었다. 왜 앉아 있지 않고? 처음에는 죽은 건가 했는데 다리가 쫙 펴져 있는 걸 보니 사후 경직이 온 것도 아니었다. 살아있다! 살아있어!


9월의 옥상은 잠자리에게 너무 뜨거웠을 것이다. 코로나 백신 주사를 맞고 앓느라 며칠 옥상에 올라가지 못했더니 물그릇도 다 말라 있었다. 더운데 물도 없고 꼼짝없이 일사병에 걸려 그늘을 찾다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나 싶어 안쓰러웠다. 잠자리로 사는 것도 쉽지 않구나.


살든 죽든 절절 끓는 메마르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보다는 흙이 나을 것 같았다. 잠자리를 모종삽으로 살짝 떠서 화분 흙 위에 올려주려고 했다. 그곳이라면 나무 그늘도 누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잠자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으와아아악! 놔라! 이 짐승아!” 하듯이 발버둥을 쳤다. 발버둥을 치다 펄쩍 점프하더니 낮게 날아서 햇빛 쨍한 쪽으로 가버렸다. 잠자리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선반 밑이 그나마 시원했을 텐데 더 뜨거운 데로 가서 어쩌고 있나 따라가 봤다. 한참 찾을 필요도 없었다. 기운이 없으니 나에게서 벗어나기만 최우선으로 했을 뿐 어디 멀리 가지도 못했다. 잠자리는 야생초밭이 드리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얼굴인데도 왠지 허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작은 숟가락에 시원한 물을 떠서 잠자리 입에 갖다 댔다. 숟가락의 둥근 면이 바닥에 기우뚱하니 놓여 물이 옆으로 샜다.


흘러나온 물 때문에 잠자리의 발이 젖었다. 잠자리는 꿈틀거렸다. 무식한 나는 얘가 물을 마시고 있는 건지 익사하고 있는 건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입을 움직이는 걸 보면 물을 마시는 게 맞는 것 같긴 했다. “오그르륵. 이… 죽일 놈아. 이번엔 물, 우엑, 고문이냐.” 이런 뜻이었다면 나는 정말 못된 놈인 거고.


잠자리 입장에서 나는 괴물일 테니 마음 편히 쉬기라도 하라고 자리를 비켜줬다. ‘제발 살아라. 물 마시고 기운 차리고 날아가서 내가 돌아왔을 땐 거기 없어라.’ 하고 빌었다. 하지만 다시 옥상에 올라갔을 때 잠자리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뒤였다. 이번에는 확실히 다리가 다 가슴 안쪽으로 포개져 있었다. 선반 아래 누워 있을 때 그 애의 마지막 휴식을 방해하지 말 걸 그랬지. 나는 매화나무 화분 흙 위에 잠자리를 고이 올렸다.


옥상 정원은 삶으로 가득 차 있는 만큼 죽음으로도 가득 차 있다. 나는 그날 잠자리의 시신 말고도, 쌍살벌의 시신들과 거미의 시신 하나를 거뒀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죽음 없이는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과 별개로 죽음에 익숙해지기는 어려웠다. 잠자리도, 쌍살벌도, 거미도, 너무 가벼워서 손 위에서 바스러질 것 같았다.


손 위에 놓인 죽음들은 너무 가벼웠다.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가서 무게가 가벼워진다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분투한 잠자리를 보라. 껍데기를 남겨두고 영혼이 어디론가 가는 거라면, 남은 껍데기에는 두고 간 삶의 무게가 덕지덕지 붙어서 아주 무거워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는 게 마치 이 정원에서의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드는 것 같아서 서운했다.


나는 손 위의 죽음이 슬펐다. 하지만 이 죽음을 아주 오래도록 슬퍼하지 못할 것 또한 잘 알았다. 나는 거미의 시신을 발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블루베리 잎 사이에 꽁꽁 싸매 숨겨둔 거미의 알집을 발견했다. 쌍살벌의 시신이 잔뜩 쌓인 다음 해에 아마도 그 둥지에서 태어나고 살아남았을 쌍살벌이 돌아와 집을 짓는 것을 보았다. 매해 찾아오는 비슷하게 닮은 잠자리들에게 손 흔들어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왔다. 나는 늘 그랬듯이 살아있는 쪽에 금방 사로잡힐 것이다.


내가 생명에 사로잡히는 순간, 슬픔의 무게보다 가벼운 게 못내 서운했던 죽음은 뒤로 밀려난다. 나를 사로잡았던 생명들은 해를 따라 변화하고 움직이면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는 결국 똑같이 죽음을 향해 간다. 그렇게 새로운 죽음을 겪고서야 나는 잊어버렸던 죽음을 다시 떠올려 그 위에 쌓는다.


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잠시 미뤄둬야 한다. 언젠가는 맞이할 내 죽음을 매분 매초 슬퍼할 수 없듯이 잠자리를 볼 때마다 그의 예견된 죽음을 슬퍼할 수는 없다. 그러느니 그냥 반갑다고 손을 흔드는 것이 낫고, 물이라도 한 그릇 떠주는 것이 낫다. 나에게는 그것이 삶의 무게를 존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나 꽉 찬 시간이었다는 것을, 가치 있는 생명이었다는 것을, 그만큼이나 슬픔의 무게가 무거웠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시즌제 죽음이 돌아오면 슬프면서 동시에 기뻐진다. 내가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어서.


죽음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정교한 설계일지도 모른다. 나는 죽음에 익숙해질 수 없기 때문에 삶에 집착할 수 있었고, 옆에 있는 생명체들을 그렇게 궁금해할 수 있었고, 그 생명체들의 가치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펜을 들었다. 내 머리가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글이 대신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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