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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Oct 25. 2022

나의 라임오렌지, 아니, 금귤나무

“요즘 어떻게 지내?” 하고 학교 선배에게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당당하게 금귤 새싹 사진을 보냈다. 손녀 사진을 자랑하는 할머니처럼. 우리 새싹들 귀여운 건 말할 것도 없고, 다 천재 같고, 식물계에 한 획을 그을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선배가 내 카톡을 받고 또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옆 집 아저씨, 옆 집의 맞은편 집 아저씨, 그리고 우리 옥상이 휑하다고 소문냈던 맞은편 집 아저씨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해 질 무렵 옥상에 올라가면 가끔 세 분이 여는 비정기총회를 구경할 수 있다. “그 집 호박은 어휴~”, “에이, 뭘! 저번에 보니까 그 집 거야 말로 진짜 실하더구먼.”, “어쩜 그렇게 잘 키우셨어요?” 하면서 각자의 옥상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계신다. 자랑하는 기술이 세련됐다. 상대방의 식물을 칭찬해줌으로써 내 식물의 칭찬을 끌어낸다. 칭찬 들은 김에 얘를 어떻게 키웠고, 이 작물의 어디가 그렇게 멋지고 하는 점들을 자랑할 기회도 잡고. 나도 선배한테 들입다 사진부터 보낼 게 아니었네.


내가 저 텃밭 총회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량 작물을 키워낼 생각은 않고 얘들을 구경이나 하고 앉았기 때문이다. 이 고질적인 귀차니즘에 힘입어 우리 옥상은 점점 실용성 있는 텃밭을 벗어나 관상용 정원에 가까워지고 있다. 첫해에는 상추니 토마토니 모종을 많이 심었지만, 점점 해 지나면 다 뽑고 새로 심어야 하는 작물이 아니라 손이 덜 가는 나무가 자리를 차지했다.


그중에는 블루베리나 미니사과 같이 열매를 먹으려고 키우는 나무도 있고, 꽃향기를 맡으려고 키우는 라일락·치자·매화나무도 있고, 잎을 보려고 키우는 여러 종류의 고무나무도 있다. 보통 크리스마스 한철 즐기고 말지만, 사실은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포인세티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발아병에 치어 심었던 온갖 씨앗 중에 살아남은 금귤, 레몬, 오렌지, 아보카도 나무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씨앗에서 시작한 금귤은 애초에 크고 튼튼했던 다른 묘목들 틈새에서 키 작은 세 살이 되었다. 원래도 크게 자라는 나무는 아니지만, 그런 것 치고도 작다. 동기 언니가 “그렇게 더디 자라면 금귤 농사짓는 사람들은 다 망하겠다.”고 할 정도다. 금귤 몇몇은 겨울 추위와 목마름에 세상을 떠났고, 살아남은 금귤 중 또 몇몇은 봄볕에 적응도 안 시키고 냅다 내놓은 초보 가드너 탓에 잎이 누렇게 바래 버렸다.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은 애들이 있고, 더디긴 하지만 여전히 자라고 있다.


금귤들은 이제 사춘기가 온 것처럼 자기주장이 강해져서는 무시무시한 가시를 세운다. 정말이다. 가시가 무슨 잎만 안 달린 줄기처럼 보일 정도로 두껍고 길다. 끝이 뾰족하고 단단해서 찔리면 꽤 아프다. 손바닥이 코팅된 장갑 따위 가뿐하게 뚫는다. 처음에는 다칠까 봐 연할 때 미리 가시를 좀 잘라줬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래, 이게 네 보호본능인 거지.’ 싶어서. “난 응애응애 하는 새싹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것처럼 줄기 아랫부분 목질화도 됐다. 울퉁불퉁한 근육처럼 갈라진 결이 제법 나무 같다.


가시가 생기고 목질화된 금귤나무


꽃은 언제 피고 열매는 언제 맺나 궁금했는데, 묘목이 아니라 씨앗을 심었으면 평생 못 볼 수도 있다고 한다. 한 10년 20년 키우면 핀다고도 하고, 탱자랑 접목을 시켜야 한다고도 하고, 금귤 먹고 남은 씨앗을 심으면 금귤나무가 아니라 탱자나무가 난다고도 하더라. 어느 게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 꽃이 피든 안 피든 이건 ‘내’ 금귤나무니까.


동생은 생명을 소유할 수는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소유한 것은 나무의 목숨이 아니다. 내가 나무를 보아온 시간들, 관찰하며 느낀 환희의 순간들이지. 켜켜이 쌓인 시간으로 나와 묶인 금귤나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득 ‘생물 다양성이 왜 중요한가?’를 설명해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입은 잘만 떠들고 있는데, 말하는 내내 붕 뜬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내 솔직한 답변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구상에서 한 종이 영영 사라지는 게 슬프니까. 슬픔은 이유로 충분하지 않나?”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대답을 한다면 누구 말마따나 ‘낭만 지랄’이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생물종이 줄어드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위협이 되는지, 혹은 다양한 생물종이 있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경제적 이익이 되는지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도 이득이라고 돈주머니를 짤랑대며 유혹하거나 이러지 않으면 당신도 죽는다고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해야 움직이는 게 이성이라면, 그 대단하신 이성도 되게 별 볼 일 없다고.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성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오글거린다면, 그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호기심을 가지고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간 대상을 해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상대를 위해서 용감해질 것이고, 똑똑해질 것이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낭만 지랄’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그때 이렇게 답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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