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게네스의 통

- 알렉산더 왕의 소망 이루기

by Naesu

알렉산더 대왕이 이루지 못한 마지막 소망을 누린 하루다. 봄볕을 받으며 ‘153 카페’에서 책을 보고 산들바람을 마셨다. 이제는 책 읽어달라 조르지 않는 막내가 오랜만에 함께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행복한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 – 지혜와 생각을 키우는 철학 동화’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알렉산더 왕이 직접 디오게네스를 찾아갔다. 디오게네스는 통 속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었다.

“무엇을 원해 나를 찾아온 것입니까?”

“나는 그리스를 정복하고 싶소.”

“그리스를 정복한 다음에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소아시아를 정복할 것이오.”

“그다음에는?”

“물론 세계를 정복해야지.”

“세계를 정복한 후에는?”

“푹 쉬면서 인생을 즐겨야지.”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참 이상하군요. 그럼, 왜 지금 쉬면서 인생을 즐기지 않으시나요? 지금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말입니다.”


막내와 나는,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의 마지막 소망을 이루고 있는 중’이라고 즐거워하며 두어 권의 동화책을 더 읽었다. 블라인드를 접고 베란다 유리문을 활짝 열어 직사광선이 들어오도록 한 채, 맨발을 꼼지락거리며 햇볕을 받고 있었다. 디오게네스의 명대사를 읊으면서 말이다.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폐하의 그림자가 햇볕을 가리고 있습니다.”

소원을 묻는 알렉산더 왕에게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청했다.

막내의 아이디어로 ‘153 카페’라고 이름 붙여진 반 평짜리 베란다에서 막내가 묻는다.

“디오게네스의 통은 이만했을까?”

봄볕을 듬뿍 받아서인지 마음속까지 햇살이 퍼진다. 잘만하면 디오게네스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나도 유명한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왕의 일화는 학창 시절에도 여러 번 접할 기회가 있었다. 들을 때마다 어질어질 휘청거리며 나의 영혼은 디오게네스에게 빨려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잠시도 디오게네스로 살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바빴다. 칭찬받는 학생이길 원했고 말썽 피우지 않는 장녀로서 동생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좋은 성적을 내서 괜찮은 대학에 가야 했고 또 할 수만 있다면 월급이 넉넉한 회사에 취직도 해야 했다.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했다. 그럭저럭 정해놓은 큰 그림에서 벗어나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완벽한 순간은 없었다.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항상 더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돈이 있을 때는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있을 때는 경제적인 상황이 적절하지 못했다.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에 아등바등 치이고 마음을 다쳐가며 살았다.

행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세상에 좋은 게 너무 많아서였다. 내가 다녔던 여행지보다 더 좋은 곳이 여전히 셀 수 없이 많다. 새로운 것을 손에 쥐는 순간, 더 좋은 것이 나오는 세상을 억지로 따라가는 것이 힘에 부쳤다.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새롭고 좋은 것들이 내 마음을 훔쳤고 그렇게 속이 빈 채 열심히 살았다. 조금 더 노력하면 완벽함에 이를 것 같은 신기루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았다. 그런 날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기다리거나 예상한 적이 없는 코로나가 찾아왔다. 아니 덮쳐왔다. 삶의 기반이라고 믿었던 것들, 이루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바친 것들이 형체도 없이 흩어졌다. 단절, 추락, 절망 같은 단어로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디오게네스의 통 근처로 옮겨져 있었다. 알렉산더 왕의 궁전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맴돌던 내가 지극히 짧은 순간,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운이 참 좋다. 빠르지도 않지만 늦지도 않은 때에 불가항력적인 시대의 흐름은 ‘나답게 살 시간’에 이르게 해 주었다. 그 모든 잃어버림은 어쩌면 다른 이의 눈에 흡족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닌, 지음 받은 대로 살게 하기 위한 절대자의 불가피한 연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되지도 못할 알렉산더 역할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졌다. 그리고 디오게네스가 받았던 볕을 한껏 받고 싶어졌다. 젊음과 열정을 바쳐 만들어갔던, 삶의 기반이라고 굳건히 믿었던 것들은 어쩌면 삶의 형태를 얽어매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왕의 제안을 거절했다. 왕궁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면서 그는 작은 통에서 우주와 함께 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통은 ‘153 카페’ 만했을까? 막내는 아예 방충망까지 열어젖히고 베란다 난간 사이로 맨발을 내보낸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워서 책을 읽는다. 까딱까딱 발가락을 움직이며 봄 하늘을, 우주를 초대하고 있나 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식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한 후에 하려던 일’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행복에 필요한 것이 너무나 작고 단순하다는 것. 막내와 같이 책 읽기, 살짝 더워서 창문 열기 좋은 봄볕, 어느 틈에 와서 블라인드를 건드리는 산들바람의 장난스러움 같은 소소한 것들, 사소해서 놓치기 십상인 아름다움이 ‘153 카페’에 찰랑찰랑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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