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든 sns에서든, 우리의 주위에는 늘 '갓생러'들이 차고 넘친다.
매일 이른 아침 부지런히 도시락을 싸는 것도 모자라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고 편집해서 업로드하는 사람, 주 5일 8시간씩 꼬박 일하고서 퇴근 후 헬스, 필라테스(외 385여 종의 스포츠)로 자기 관리하는 사람,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자기 계발로 빼곡한 일과표를 멋지게 수행하는 사람, 고단했던 하루를 명상과 감사일기로 마무리하는 사람....
어떠한 형태든 매일을 알차고 성실하게 보내는 분들을 보면 감탄이 나오고 존경심이 들기도 한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데, 나 또한 한때 누군가의 눈에는 갓생 사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내가 일하던 회사는 시기에 관계없이 늘 바빴다. 나는 방통대 학사 과정을 병행하며 일을 했고, 점심은 도시락을 싸고 다녔으며 헬스장도 꽤 오래 다녔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동료들에게 "00님 갓생 사시네요."라는 말도 더러 들었다.
되돌아보면, '그게 정말 갓생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회사에 다닐 때의 난 끝이 안 보이는 일더미에 허우적대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점점 소진되어 닳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그때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퇴사에 대해 고민했다. 이미 다니고 있는 학교 졸업은 해야 했고, 식당에서 밥을 사 먹고 있을 여유가 없어서 도시락만 후딱 먹고 다시 일해야 했다. 이런 쓰레기 체력으로는 큰일 나겠다 싶어서 PT도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실상이 어찌 되었든 그런 말을 듣는 것 자체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인정을 받는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진짜 퇴사를 하게 된 이후에도 '갓생러 되기' 프로젝트는 멈추지 않았다. 회사에 다닐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시간적인 여유가 많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분해서 쉬는 기간 동안 많은 걸 해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일을 안 하니까 학점은 A 정도는 받아야겠고, 자격증 공부도 하고 싶고, 영어 회화 영상도 매일 꾸준히 봐야겠고, 스케치업이니 그림이니 관심 있던 취미도 하나씩 독학해 보고, 하루를 루틴화해서 이참에 좋은 습관도 좀 들이고.... 해야 할 목록들이 하나씩 늘어가며 이걸 다 해내면 왠지 인생을 '잘' 살고 있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하나 둘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성취감과 성장을 느끼는 긍정적인 순간도 있었지만, 종종 예기치 못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별다른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는 날들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해야 할 일은 시작조차 하기 싫고, 그대로 쭉 무기력한 날들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일할 때는 좋든 싫든 매일 아침 몸을 일으키고 사람들과 섞이며 억지로라도 활동할 구실이 있는 반면 퇴사한 지금은 온전히 능동적으로 무기력을 깨고 나와야 한다.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 뿌듯한 날들과 모르겠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은 날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다 문득, 꼭 나의 모든 날이 반짝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태해지거나 좋은 일자리에 취업하지 못한다고 해서 누가 칼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운 건 아닌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와 타협했다. '갓생' 살기 전에 일단 그냥 살자고. 매일 8시 전에는 일어나면 좋겠지만 하루쯤 늘어지게 늦잠 잔다고 그날 하루가 망하지는 않는다. 오늘 계획한 공부 진도를 못 나갔다면 다른 날 하면 된다. 미래의 내가 시험 전까지는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화이팅!). 애초에 내가 세웠던 하루 루틴 중 내 몸에 습관처럼 베어 하루도 빼먹지 않은 일은 기상 직후 이부자리 정돈하기와 따뜻한 물 한잔 마시기 정도로, 타율로 따지자면 10%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어찌 됐든 0%에서 나아갔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대신 이번 퇴사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건강 챙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몸 여기저기 AS 받아야 하는 부분들이 많은데, 정신 차려보니 다른 자잘한 일들에 주객전도 되고 있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딱 맞는다. 덜어낼 건 덜어내고 부지런히 병원 예약부터 했다.
지금도 여전히 때때로 나태하며 종종은 불안한 백수의 일상이지만, '그냥 살자'라는 말을 되새기며 거북이 경주하는 속도로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채워간다. 이 또한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이다(안 그랬음 쉽게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 이상 갓생러라는 칭호는 없어도 괜찮다. 스스로에게 해주는 '잘 살고 있네' 응원 한마디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