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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사위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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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혁 Nov 13. 2024

SF 단편소설 - 주사위

09

절단기를 가동한 첫날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주사위는 역치 이상의 압력을 가하면 유체의 성질을 띈다. 손으로 면을 아무리 눌러도 전혀 변형이 없지만, 증폭된 빛을 매우 좁은 면에 가져다 대자 물에 젖은 종이처럼 제 형태를 잃은 얇은 면이 잘려 나왔다. 둘째는 문제점에 가까웠다. 그 액체와 고체의 중간에 있을 법한 얇은 면을 보관할 장소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서 삼천 개의 정보를 뽑아내 저장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흐물흐물해진 면들을 한 손에 세 장씩 들고 있었다. 주사위를 자를 방법만을 생각한 채, 자르기만 하면 내용은 자동으로 알게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 이후의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안일했다다.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외계 종족의 메세지는 여전히 삼차원이고, 당연하게도 이 얇은 종이들에는 주사위의 겉면과 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점과 선의 조합이 존재할 뿐이었다. ( 이차원 종족이 ‘2’를 자를 때를 생각해보아라. ) 책상에 조심스레 올려놓아도 종이들이 훼손되지 않는 걸 확인한 뒤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어떻게 했던 것인지 생각해보았으나,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을 생각한다면 삼천 개의, 또는 그보다 많거나 적은, 그림을 전부 기억한다는 터무니없는 방법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실제로 그는 그런 일이 당연히 가능하다는 생각에 글로 적지 않았다는 추론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나는 삼천 개는 커녕 한 개도 제대로 머릿속에 저장할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짐작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고민 끝에 지인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했다. 아쉽게도 그림 삼천 개를 완벽히 기억할 만한 인재는커녕 ‘가장 똑똑한 사람들’에 속하는 지인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내 부탁을 들어주려면 천재성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진료를 마치고 윤을 찾아갔다. 윤은 자신만의 작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았는데, 정작 본인은 그곳을 공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량생산보다는 나처럼 특수한 물건의 주문 제작을 요구하는 고객이 주였으니 공장보다는 제작소 정도가 어울렸을지도 모르지만 윤의 반응을 즐기는 나는 그냥 공장으로 불렀다.

소개하지는 않았으나 의술 밑으로도 지능에 따라 가지는 직업이 결정되어 있었다. 아마 윤이 업으로 삼은 제작이나 기술은 중간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속했는데, 윤이 평소 만드는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생각하면 윤은 그 직업을 가진 남들보다 더 똑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료소에 있는 특이한 도구들 역시 그가 만들어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에게 요청한 것은 아주 얇은 투명한 막에 원하는 무늬를 새겨주는 기구였다. 주사위를 자른 종이에 나타나는 점과 선들을 막에 그대로 옮긴 뒤, 삼천 개의 투명한 막을 서로 합칠 생각이었다. 주사위의 투명한 복제본을 만들어내는 셈이었다.

윤에게 주사위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만든 기구 중 가장 신기하고 쓸 일이 없어 보이는 것이라며 호기심을 가졌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을 물어보지는 않겠다며 미소지었다. 그가 같은 미소를 보이며 대신 물건의 대가를 배로 받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의 호의를 고맙게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다. 윤은 눈치가 아주 빨랐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다행히 그 남자에게 받은 엄청난 액수의 돈이 절반도 넘게 남아 있었다. 기구는 바로 다음 날 받을 수 있었다. 주사위 절단기만큼은 아니지만 작지 않은 크기였다. 진료소의 한 층이 진료와 상관없는 무언가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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