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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사위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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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혁 Nov 16. 2024

SF 단편소설 - 주사위

10

먼젓번에 잘라 놓은 면을 먼저 윤의 기구에 올려놓자, 예상한 그대로의 투명한 종이가 출력되었다. 윤은 내가 아는 최고의 기술자였고, 정부의 기술원에서 일하는 ( 기술원과 윤의 공장은 의술원과 나의 진료소 사이와 비슷한 관계였다 ) 기술자들보다도 실력이 좋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말했는데, 진위는 알 수 없었지만 터무니없는 말은 아닌 듯했다.

그날 밤에는 드디어 온전한 하루치의 결과물을 얻었다. 전날의 몇 장을 더하자 투명 막은 예순 장이 조금 안 되었는데, 그것들을 합쳐도 주사위 두께의 반의 반의 반도 미치지 못했으므로 삼차원의 무언가를 확인하기에는 일렀다. 막을 얻고난 뒤 종이, 그러니까 주사위에서 잘려 나온 그것들은 조심스레 쌓아두었다. 그의 글에서는 다시 주사위로의 원상복구가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어떤 원리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실은 그가 주사위를 얻어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 수 백개로 늘어난 막을 하나로 쌓자 투명한 직육면체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차원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 기호들이 삼차원을 이루며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반복 작업이었으나, 그 끝에는 지금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테였다. 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 나를 그토록 전율하고 긴장하도록 만들었던, 외계 종족의 마지막 말. 

그 순간 나는 투명한 주사위가 완성되기 전까지 그 직육면체에 표현된 그림을 확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순간은 모든 것이 끝난 마지막에 찾아와야만 했다. 예견되지 않은 마지막은 재앙과 동의어였으므로, 내게 어떤 형태로든 그런 일이 찾아오는 것은 막는 것이 안전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매일같이 반복되는 작업 도중에 손을 땀으로 적시는 일은 줄었다. 적어도 외계 종족의 말을 마주하는 그날까지는 내게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그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착실히 쌓이는 삼차원의 투명한 주사위를 보면 찝찝한 의문이 밀려왔다. 이차원 종족은 인간이 쓰는 이차원 문자를 확실히 인지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삼차원 문자를, 단순히 그 매개를 투명하게 바꿨다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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