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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사위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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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혁 Nov 18. 2024

SF 단편소설 - 주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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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절단기에서 윤의 기구를 거쳐 주사위의 복제본에 층을 추가하는 과정이 전부 자동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두었다. 목표치가 채워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작동해야 하는 기구들에서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났다. 본능적으로 주사위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진료소에 환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이 층으로 올라가자 예상대로 일을 마친 기구들이 헛돌고 있었다. 오십 장을 만들기 전에 주사위가 완성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들의 작동을 멈출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기구들의 소리가 멈추고 공기의 흐름도 함께 멈춘듯 조금의 바람도 불지 않는 한낮의 침묵 속에서, 나도 모르게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뤘던 의문들과 해결하지 않은 채 마음 속에 쌓아두었던 감정이 정신적인 방어벽을 결국 허물어버린 듯 돌진해왔다. 삼 개월 간 일어난 모든 일들의 결과물이 몇 발자국 앞에 있는데도, 어쩌면 있었기 때문에,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주사위 복제본은 지나치게 정교했고, 그 원본만큼 날카로웠다. 어쩌면 조금 더 단단한 질감이 원본에서 느껴지는 인지의 부조화를 줄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또 투명한 만큼 영롱한 정육면체에 입사한 빛은 제멋대로 굴절되어 자신의 주변을 오색으로 밝혔는데, 그 모습이 원래의 목적을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순간, 주사위를 두른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불이 꺼지듯 빛이 사라지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현상이었다. 이 외계스러운 체험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나의 이차원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단지 주변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주사위와 나를 제외한 세상 전체가, 연극의 배경이 뒤로 꺼지듯, 우리 둘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달라진 환경은 다른 감각으로도 실감되었다. 기계들의 대기 전력이 윙윙거리며 구르던 소리도, 차라리 오리의 울음을 닮은 새 소리도, 소리라는 개념이 원래부터 없었던 양 사라졌다. 역설적이게도 익숙한 진료소의 냄새는 부재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냈다. 

나와 같은 차원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에게 이 정도의 조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내게는 무엇도 지각되지 않았으나, 주사위와 나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어떤 물건으로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차라리 나를 둘러싼 물방울처럼 투명한 막이 실재한다고 상상하니, 생전 처음 경험하는 자극에 미친듯이 뛰던 심장이 아주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물방울은 아까부터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느껴질 정도로, 일렁였다. 그것이 나의 상상이 만들어낸 환각인지, 또는 진짜 그런 형상의 무언가가 존재했는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쩌면 나의 상태를 반영한 것인지, 잔잔하던 물결이 완전히 멈췄다. 

그제야 원래의 목적을 기억해 낸 나는 주사위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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