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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사위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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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혁 Nov 17. 2024

SF 단편소설 - 주사위

11

한편으로는, 그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착실히 쌓이는 삼차원의 투명한 주사위를 보면 찝찝한 의문이 밀려왔다. 이차원 종족은 인간이 쓰는 이차원 문자를 확실히 인지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삼차원 문자를, 단순히 그 매개를 투명하게 바꿨다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두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첫째, 어쩌면 단지 주사위의 내용이 문자가 아니라 그림이라서 이해가 쉬운 것일지도 몰랐다. 가령 그들이 원래 사용하는 주사위에는 문자가 적혀 있고, 그 정보량은 이차원 문자보다 훨씬 방대할 수도 있다. 가령 다섯 번째 주사위만한 크기에 한 문단이 통째로 들어있는 것도 가능했다. 

아니라면, 좀 더 근본적으로, 증가한 차원이 차이점을 유발한 것일까? 사차원에서 삼차원을 보는 것과 그 반대의 경우는, 삼차원에서 이차원을 인식하는 것과 그 반대의 경우와, 물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행위인 것이다. 애초에 이차원 종족은 그 남자가 글의 이해를 위해 멋대로 만들어낸 비유에 불과했다. 비유의 효과는 확실했지만, 현실도 동일하라는 법은 없었다.

만약 두 가설이 모두 틀렸다면, 그가 해석한 그림의 내용이 틀렸거나, 적어도 그들이 의도한 바와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주사위를 읽는 것은 그가 제시한 방법과 전혀 다른 물리적 행동이고, 그것이 사차원에서만 가능하다면, 지금 나의 행동은 아예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었다.

호기심이 끊이지 않았으나, 다짐한 대로 투명 주사위의 진행 과정을 확인할 수 없었으니 방법은 억누르는 것밖에 없었다. 일차원적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것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짓이었다.

다행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투명 막이 떨어져서 윤에게 두 번이나 더 다녀왔고, 역시 평소보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또 작업이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 뒤에는 환자를 조금 더 받을 수 있었다. 주변 진료소들에게는 아직도 부족하다며 일침을 들어야 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4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두 번째 보름달이 떴다. 내일이면 그토록 기대해왔던, 동시에 두려워해왔던 그들의 마지막 말을 ‘볼’ 수 있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베개가 불쾌하게 땀에 젖은 것이 느껴져, 몇 번이나 뒤집어야 했다.

동시에, 오늘은 우연히도 그 남자가 받은 약이 다 떨어지는 날이었다. 벽 한쪽에 걸린 달력을 넘기면서 그를 처음 발견했던 세 달 전의 그 날을 마음에 그렸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는 그대로 생을 마감하고, 그 누구도 주사위를 해석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디선가 새로운 천재가 나타나 해석에 성공하고, 나 대신 전 세계에 그 내용을 공표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수많은 의문이 또 다시 피어 올랐다. 내가 내일 주사위를 완성한다면, 나의 세상은 바뀔 것임은 직감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세상이 뒤바뀔 일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까? 섣불리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여태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은 주사위를 완성한 뒤로 미루면 마음이 편해졌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나 베개를 세 번 정도 더 뒤집은 뒤에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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