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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는, 원본이 아닌 복제본인데도, 내 손을 살짝 벗어나 공중에 자신을 띄우고 있었다. 주사위를 만든 이들의 조작이 그렇게 만든 듯했다. 중요한 건 주사위 자체가 아니라 역시 그들의 능력임이 분명했다. 나는 어렴풋이 보이는 주사위 속 삼차원 그림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 주사위의 모양이 일그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희미한 검은색 빛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투명한 빛도 함께, 조금씩 밖으로 내뿜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내가 보려고 하는 그림의 일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주사위는 이제서야 그들의 메시지를 펼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주사위를 보는 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주사위는 문자나 그림조차도 아니었다. 그들의 말을 전하기 위한, 말하자면 인간 세상의 전화기에 불과한,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겨먹은 매개체. 그뿐이었다.
반응할 새도 없이, 주사위에서 발산한 흑백의 빛은 사방으로 펼쳐져 조금씩 저들의 영역을 넓혀갔다. 먹물이 섞인 비눗방울이 점진적으로 커지는 모양새로, 일종의 파동이 진행하듯 주위 공간까지 함께 떨도록 만들면서. 그것들이 내 몸에 닿았을 때, 불운하게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말도 가지지 못했으나, 나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듯 나를 투과해 지나갔다. 조금 뒤 나는 계속해서 커지는 비눗방울 속에 들어와 있었었다.
영겁처럼 느껴진 찰나가 지나, 처음의 떨림을 하나도 잃지 않은 파동이 가장 먼저 생긴 물방울에 도달했다. 두 구체가 원래 하나였다고 속삭이듯, 부드럽고 조용하게 합쳐졌다. 그곳에는 내가 삼 개월 동안 찾았던, 아니라면 나를 삼 개월 동안 기다려 왔던, 그들의 마지막 말이 있었다.
그건 마치 손님이 한 명뿐인 영화관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사방이, 아니 눈길이 닿는 모든 방향으로 주사위에서 비롯된 영상이 재생되었다. 난데없이 그 남자의 글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던 것일까? 왠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나타난 영상에는 글의 묘사에서처럼 물리학자들이나 이차원으로 비유된 인간 세상 등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무언가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원인이 그가 주사위를 완전히 해독하지 못했거나, 다섯 번째 주사위가 여타의 그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후자의 생각이 맞으리라는 직감은 내 원인 모를 바람이 만들어낸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영상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처음에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세상이었다. 망원경의 배율을 늘리듯 천천히 확대된 영상은 곧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장소를 보여주었다. 그곳은 분명 방금 전까지 발을 디뎠던 나의 진료소였다. 그것도 진료소 내부를 누군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듯한, 아주 생생한 일인칭 영상이 나타났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매일 마주하던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허공에 띄워져, 아주 느리고 무질서한 운동을 반복하고 있는, 십 년 전 나타난 모습 그대로의, 주사위 다섯 개.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다시 한번 그의 말이 떠올랐다. 주사위가 유발하는 감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읽을 당시에는 단지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하려고 붙였을 뿐이라고 생각한 그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 그래서는 안 되는 장소에, 그래서는 안 되는 방법으로, 존재하는 모양새는 기괴함을 넘어 공포스러운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눈앞에 놓인 주사위들만이 상황의 비현실성을 일깨워주었지만, 내 몸은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했다. 아니, 뇌를 제외한 신체가 가지는 동물적인 감각들이 지금의 경험이 비현실 따위가 아니라는 신호를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주사위들이 제자리에서 운동하는 속도를 늦추었다. 무질서한 듯 보였던 배열은 어느새, 세월의 풍파 없이 반듯한 모서리를 서로 맞추어, 정렬했다. 나의 감각이 틀리지 않다면, 나를 향한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들은 곧 완전히 멈췄다.
그리고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다섯 개의 정사각형 눈을 가진 외계 종족이 있다면, 그것과 마주하는 경험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