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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사위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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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혁 Nov 20. 2024

SF 단편소설 - 주사위

14

그것은, 역시 삼차원에 존재할 뿐인 나의 묘사로는 최선이었으나, 과학적인 표현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감각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감각되는 세상이 영상이라는 생각을 잊은 지 오래였고, 주사위를 포함해서 내게 보이는 모든 것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무엇이라도 움직여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잎 하나를 흔들 만한 공기의 흐름조차도 사라져 버린 것이 분명했다. 나의 의지와는 달리 내 손끝조차 움직임을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의 감각을 제외한 모든 세상이 멈추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특권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삼 개월 전 내게 찾아온 행운으로, 어쩌면 불행 또는 운명으로, 멈추어버린 세상의 최후를 감각할 수 있는 결말을 맞이한 것은.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는 않는 대부분의 세계의 결말에서도, 그 이야기의 일부일 뿐인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우연. 그러나 나의 결말을 우연으로 정의했다. 따지자면 그것은 행운도, 나라는 존재의 특별함도 아니었으니. 생각해 본다면, 내가 그를 발견한 것은 결코 예정된 운명 따위도 아니었다.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나름대로 겸손한 단어였다. 내게 찾아온 우연 덕분에, 세상의 마지막은 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먼저 정지된 세계를 벗어난 것은 다섯 개의 주사위였다. 아까와는 달리 같은 방향으로 회전을 시작한 그것들은 지금껏 보지 못한 속도로 빨라졌다. 강한 힘에 그 주변부터 세상이 일그러졌다. 찢어진 그림처럼 일그러진 세상은 다섯 갈래로 공평하게 나뉘어, 각각의 주사위로 공평하게 빨려 들어갔다. 고무처럼 늘었다 수축했다를 반복하면서. 주사위는 점점 더 넓은 세상을 거두었다. 처음에는 제 형태는 아니었으나 사라지는 조각들의 형태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모든 일이 시작된 진료소가 최후를 맞았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우연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자신이 만든 투명 막처럼 쪼그라든 윤의 공장, 아니 제작소가 보였고, 곧 의술원과 기술원도 사라졌다. 다행히, 조금 끔찍한 광경이었을, 사람들의 마지막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점차 세상은 삼차원 형상보다는 점과 선, 그리고 면으로 분해되어, 마지막을 맞은 별이 폭발하듯, 엄청난 속도로 주사위에 흡수되었다. 나는 그 모습이 마치 주사위 겉면에 드러난 의미없는 무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광활한 세상을 삼키고 있음에도 주사위는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강력한 회전에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각각 열 두 개의 모서리가 제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린 세상과 대비를 이루었다. 모든 일이 벌어지는 속도는, 완전한 마지막이 올 때까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사위의 회전이 멈췄다. 언제 모든 것을 집어삼켰냐는 듯 얌전히 둥실거리는 그것들은 어김없이 나를 바라봤다.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으나, 외계인을 보는 듯한 이질감이나 공포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랫동안 강제적으로 숨을 참았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숨을 쉬기 위한 근육들이 원하는 대로 작동했다. 세상이 끝나고 나서야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의지대로 손을 뻗을 수 있게 되었으나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주사위들은 첫 등장이 그러했듯, 어떠한 징조도 없이, 그러나 인간의 세상 전부를 머금고, 무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것들이 있던 곳에는 찰나간 이어진 공간의 진동만이 남았다. 정말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사방이, 아니 눈길이 닿는 모든 방향이 광활한 태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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