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주사위 16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윤혁 Nov 24. 2024

SF 단편소설 - 주사위

16

부모님께는 지금껏 온갖 형태로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을 주셔서, 지인들에게는 각자 특별한 관계를 형성해주었기에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주변 진료소 동료들은 불평을 하기는 했지만 내 환자들을 나누어 받아주어서, 물리학자와 언어학자들에게는 주사위 연구의 기초를 쌓아두어서. 그들은 각자의 이유로 내가 전하는 감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또, 부모님께는 평소에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지인들에게는 마지막으로 만나지 못해서. 진료소 동료들에게는 그들이 준 도움을 갚지 못해서, 또 연구자들에게는 내가 알아낸 주사위의 비밀을 끝내 공유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속으로 읊었는데도 공기를 타고 흘러나갈 듯했다.

사람들이 한 명씩 머릿속을 떴다. 그 기분조차 싫지 않아서 그대로 두었다. 마지막 남은 이들과 함께 감사함과 미안함의 감정을 흘려 보냈다. 외계 종족의 세상이나 주사위 속에서 계속되는 세상에서, 어쩌면 새로이 만들어질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내가 흘린 두 감정을 주워담아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은 지금의 나만큼은 아니어도 평온함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테니.

이제는 마음에 흔들림을 일게 하는 생각도 남지 않았다. 주사위가 세상을 흡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세상은 점점 무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사라지니 감각은 더욱 선명해졌다. 되살아난 공기의 흐름이 피부를 스쳤다. 느긋한 발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 진동을 반사할 무엇도 없지만 메아리까지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몇 시간 동안이나 지치지도 않는 발걸음이 계속되었다. 영원토록 아무것도 등장하지 않을 듯했던 광활한 배경에, 익숙한 그림체로 아로새긴 무언가의 머리가 들어왔다. 

세상이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가까워질수록 전체를 드러낸 것은, 햇빛을 잔뜩 머금어 그 색을 띄게 된 것인 양 밝게 타오르는 거대한 은행나무였다.

지워지지 않은 세상이 남은 것인지 생각했으나, 은행나무 너머에도, 걸어온 길을 돌아봐도 계속해서 봐왔던 대지뿐이었다.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나무라고 생각하자, 같은 은행나무도 어딘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 나무도 어쩌면 유일하게 남은 인간인 나를 특별한 존재로 여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울렸다. 

나무에 기대어 앉자 피로감이 느껴졌다. 세상이 멸망했다고 갑자기 다리가 강인해질 일은 역시 없는 듯했다. 이대로 잠들면 오늘만큼은 바람이 근처에 머물러 이불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런 일은 없었으나 적잖이 쌓인 잎사귀 덕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곧 잠긴 눈꺼풀 위를 바람을 타고 흘러내린 잎사귀가 덮었다.

7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꿈이 아니라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잠에서 깼다. 수북해진 은행잎을 들어내자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의 간질간질한 촉감이 얼굴을 덮어 냈다. 따스한 햇살과 함께 미소 짓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김없이 비현실감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했다. 햇빛을 품어 빛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나는 세상을 향해 미소 지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