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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사위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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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혁 Nov 21. 2024

SF 단편소설 - 주사위

15

6

쉽게 가시지 않는 비현실감은 전신을 수십 바퀴째 맴도는 역치를 가뿐히 넘긴 전류와 함께 오히려 방금까지의 경험이 꿈 따위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심장이 전처럼 발작하거나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사방을 둘러싸고 태양에서 도달한 빛을 가로막던 시각 자극들이 없어서 그런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평온함만이 남았다.

강산이 변해도 습관은 잘 안 바뀌는지, 평소에 그랬듯 가만히 있기보다는 무작정 움직였다. 대지만이 남은 세상에서 주변에 맞추어 방향을 틀 이유는 없었다.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걸음 끝에 무언가가 남아있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 바라본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걸을수록 몸이 가벼워졌다. 재촉하던 걸음이 느긋해진 동시에, 호수처럼 잔잔하던 마음에도 몇 개의 파문이 일었다. 이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나, 단번에 지워지지는 않은 몇 개의 생각이 남아 있었다. 세상이 멈출 때 내 신경계가 함께 멈추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 남자였다. 세상의 마지막에 내게 찾아온 우연의 시작. 어쩌면 세상이 멸망하도록 만든 장본인일 수도 있는 그와 그의 글을 생각했다. 

그가 해석한 외계 종족의 말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짐작하기로, 그들이 주사위, 특히 내게 보내진 다섯 번째 주사위를 보낸 것은 우리의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의도한 일이었을 것이다. 앞의 네 개는, 관점에 따라 그들의 경고나 주의로 볼 수도, 선전포고로 볼 수도 있었다. 그것들에 새겨진 그림에 대한 그의 해석은 나름 정확했다. 아마, 점진적으로 그러나 점점 가속하면서 발전하는 인류의 과학은 외계 종족에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피해를 주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주 묘사되는, 양성자 등의 입자를 충돌시키는 실험들은 삼차원에서는 단순한 실험에 그쳤지만, 그 이상의 차원에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과학 발전으로 인한 피해가 증가하자, 세 번째 주사위에 새겨져 있듯이, 그들은 자연재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여러 번 경고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자연재해를 하늘의 뜻 따위로 해석한지 오래였던 인류가 경고를 이해했을 가능성은 전무했고, 그들이 입는 피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우리가 벌였던 과학 실험과 마찬가지로, 삼차원의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세상을 멸망시켰을 것이다.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마지막 주사위에 담긴 내용, 그러니까 세계의 멸망을 예측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가 내게 고민하라고 말했던 것은, 그는 단지 주사위가 멸망의 메세지만을 전하리라고 추측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렇다면 왜 직접 마지막 주사위를 확인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했다.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일이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만약 후자라면, 이 모든 것의 책임을, 또 어쩌면 권리를, 내게 맡겨버린 것에 대해 항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었거나, 설령 마지막까지 살아있었더라도 다른 모든 것과 함께 주사위 속에 존재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의 말대로 그의 행동이 양보와 회피 중 어느 쪽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가 초래한 모든 우연에서 벗어나, 그 또는 다른 누군가가 마지막 주사위를 확인해서, 세상의 일부가 되어 마지막을 맞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좋고 싫음 중 어느 범주의 감정도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음으로는 방금 전까지도 나와 함께 이곳에 속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시간은 주사위 속에서 다시 흐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되었든 최후의 순간에는 그들의 감각이 세상과 함께 멈추었었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점과 선으로 나뉘는 일이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 남자 다음으로 생각난 것은 의외로 윤이었다. 윤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까. 그 순간이 내가 요청한 괴상한 기계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들 중 나도 일부를 차지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가속하면서 빨려들어가듯, 점점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부모님, 지인, 주변의 진료소를 운영하던 이들, 주사위를 연구한 물리학자와 언어학자들. 아까처럼 섬세한 감정들을 주지는 못했으나 복합적인 감정들을 덮어버린 두 개가 뚜렷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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