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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쓸어요

by 정담은그림

12월.

겨울답게 춥고, 고드름도 얼고, 눈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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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동네엔 재개발로 인해 이사를 가 빈 집들이 많다. 철거를 곧 시작하는 이 동네 길에 눈을 치울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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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면 으레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에 내 발자국 찍으며 걸어가는 기분은 즐겁지만, 이후에 눈을 쓸어내는 사람에게는 부담이다. 내 몸무게만큼 눌린 눈 발자국이 빗자루로 쓸어도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빗자루로 여러 번 박박 문질러야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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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얀 눈 밭을 밟는 낭만을 즐기기보다는 우선 쓸어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다.

눈싸움하고 노는 건 그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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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많이 쌓이면 치우기 힘들어 계속 쓸어냈다. 우리 집 앞으로 쭉 이어진 골목에서 큰길 어귀까지, 내 집 남의 집 할 것 없이 허리 숙여 오직 땅만 보고 열심히 비질을 했다.

내 앞을 딱 막아선 수면잠옷에 삼선 슬리퍼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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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염화칼숨을 가져와 쌓인 눈 위에 뿌리고 있었다.

열심히 비질을 한 내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눈 내리면 비질을 하지 않아도 눈을 녹이는 염화칼슘이 많이 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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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는 이미 제설차량이 뿌리고 다녀서 눈이 녹아 없지만, 인도는 사람이 눈을 치우지 않는 이상 눈은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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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쉽게 눈을 녹이는 염화칼슘이 도로나 인도를 상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적당히 뿌려야 하는데 너무 많이 뿌린 곳도 보인다.


눈이 오면 즐겁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으며 우리의 감성은 충만해진다.

하지만 출근도 해야 하고 빨리 어딘가로 가야 한다. 그래서 도로나 거리의 눈은 치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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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발자국 찍어 남기는 낭만은 없어도

빗자루로 눈을 치우는 낭만은 아직 간직하고 싶은 1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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