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초이 Jan 04. 2024

베이비 팬케이크

브리즈번 day 2

7월 24일 일요일

            

피트니스 룸에 가려다가 말았다. 거리를 걷는 걸로 하기 싫은 운동을 대체하기로 했다.

일요일 오전에만 열리는 밀턴 마켓Milton Markets을 향해 떠났다. 

로마 스트리트Roma Street를 따라 한참 걸었더니 시장이 나타났다. 미니마켓이라고 했지만 장보기에 알찬 장소였다. 한국 반찬가게처럼 골라 담아 3개에 10불도 보였다. 여러 종류의 과일과 신선한 야채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눈이 상쾌해진 느낌이었다. 블루베리, 라즈베리, 무화과를 구입했다. 맛보기로 백 퍼센트 퓨어 트로피컬 과일주스를 주문했다. 점원이 내 이름을 물어봐서 피노, 했더니 굿 네임이라고 말하며 빈 주스잔에 이름을 적었다.

작게 꾸며진 공연 무대도 있었다. 아빠와 14살 아들이 색소폰을 불며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무대 주변에 둘러앉아 공연을 감상하며 뭔가를 먹었다. 나는 베이비 팬케이크, 누아는 독일식 핫도그를 샀다. 가격도 저렴했고 맛도 좋았다. 누아의 핫도그 소시지가 길어서 다 못 먹을 줄 알았는데 다 해치워서 놀라웠다. 시장 입구에 거지가 어슬렁거렸다. 외국에서 여행을 하다가 거지와 마주치면 유독 민망했다. 왜일까. 거지가 여행객을 보고 민망해할 것 같기 때문인가.

시장 구경을 마치고 브리즈번 강을 건넜다. 코끼리가 거꾸로 서있는 동상이 특이했다. 덩치가 큰 동물이어서 그 무게가 배로 느껴졌다.

퀸즈랜드 현대미술관Gallery of Modern Art에 갔다. 

흑인 아이의 찡그린 얼굴 그림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림 제목은 BLACKFELLA ME. 어떤 감정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림이 그걸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 시인의 자존심은 어디 갔는지.

우리는 사방이 거울로 된 방에 들어갔다. 자판기라는 이름의 작품이 있어서 버튼을 눌렀다. Health. Lovers. Plural. 이런 단어들이 종이로 인쇄되어 나왔다. 자판기 안내대로 그 옆에 놓인 넓은 쿠션에 몸을 뉘었다. 자연스럽게 손에 쥔 단어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옆에 누운 누아에게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무슨 뜻일까.

건강. 연인들. 복수형. 누아가 번역을 했다.

뭔가 더 중요한 뜻이 있는 것 같아.

모르겠어. 시인인 너가 해석해 봐.

사랑은 둘이 한다는 말이 아닐까.

둘이라는 말이 어딨어?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잖아.

둘 이상일 수도 있지.

뭐?

꼭 둘만 하는 게 사랑은 아니잖아?

너 호주 와서 너무 리버럴해진 거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건강은 무슨 의미일까.

건강해야 사랑도 하는 거니까.

너 건강하지?

그런 것 같아.

그럼 사랑할 준비는 됐구나.

그 말에 누아는 아무 대답을 안 했다.

한참 동안 누워서 천장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옆에 누운 누아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보이니? 내가 물었다.

뭐가?

내가.

응.

나도 너가 보여.

누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나와 누아가 예약해 둔 디엣지The Edge에 갔다. 강물에 바로 접한 작은 도서관이었다. 비어있어야 할 자리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동양 여학생이었다. 왠지 말 걸기가 망설여졌다. 누아가 한 발 한 발 다가가자 여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비워줬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각자 작업을 했다. 브리즈번 강과 강변길을 바로 내려다볼 수 있어서 대만족이었다. 이런 곳이 메인 도서관 부속 시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플랫 화이트를 두 잔 사서 마셨다. 풍경에 걸맞게 커피 맛도 일품이었다. 강변길에 다양한 사람들이 걷고, 뛰고, 자전거나 킥보드를 탔다. 그동안 너무 하나의 인종만 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양각색의 얼굴과 몸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 같았다. 강물 색깔이 흙빛이라 의아했다. 요트와 제트스키가 강물을 가르며 지나갔다.

하나가 둘이 되다가 

다시 하나로 되는 꿈

강물은 꿈처럼 흘러만 가네

그렇게 짧은 시를 쓰고 더 엣지에서 나왔다.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햇빛이 강했다. 스치는 행인들 중에 동양인 비중이 높았다. 일본말이 많이 들렸다.

아이리시 머피Irish Murphy's라는 라이브 펍에 갔다가 빈자리가 없어서 나왔다. 

브리즈번 스퀘어에 앉아 다시 갈 곳을 찾았다.

브루 카페 앤 와인 바Brew Cafe & Wine Bar에 갔다. 이름도 모르는 로컬 비어랑 사워 애플 마가리타를 마시고 치킨 슈니첼을 먹었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세븐 일레븐을 들렸다. 편의점은 거의 세븐 일레븐뿐이었다. 이 도시가 일본 자본에 많이 잠식된 듯 보였다. 문화적인 면도 일본 색채가 많이 섞여있었다. 오노 요코를 개 이름으로 정한 사람을 티브이에서 본 적도 있었다. 길거리에는 동양 여자와 서양 남자 커플이 어느 나라보다 흔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마트에서 사 온 과일을 먹었다. 맛이 없었다. 빨래를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옮긴 누아가 다가왔다. 나는 누아에게 과일을 먹어보라고 했다.

어때 맛있어?

아니.

한국 과일이 맛있는 거 같애. 누아가 말했다.

그래?

응.

한국 가면 많이 먹어.

그래. 한국... 가면...

왜?

근데 우리... 한국... 좀 더 있다가 갈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누아가 무슨 말을 했는데 빨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건조기에서는 빨래 말리는 소리만 들렸다. 일상의 소리였다. 이곳이 어디인가. 한국인가. 호주인가. 여행이 계속되고 있는 건가. 언제까지. 

응? 누아가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호주고 우리는 여행 중이며 나는 일상 같은 여행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녀가 여행을 연장하고 싶어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일상 같은 여행이 여행 같은 일상이 된다는 것인가. 이미 두 번이나 건넌 빅토리아 다리를 매일 건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중요한 건 누구와 다리를 건너면서 노을을 보는가. 그것 아닐까.


이전 13화 소설 쓰고 있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